이번 학기가 시작하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글쓰기」 수업에 들어가 보니, 몽골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리비아 학생도 있었다. 그 사이에 흑인 학생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아흐마트 디모’라는 학생이다. 검은 피부색이나 꼬불꼬불한 머리카락 그리고 날렵하게 잘 빠진 몸매가, 그가 정통 아프리카 흑인이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맑은 눈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20대 초반인데도 불구하고, 흔히 아프리카 어린이들 사진에서 유난히 도드라지는 그런 맑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착하고 순진해 보였다. 아직 소년티
실크로드는 시안에서 시작해서 로마에 이르는 장대한 중세 무역로이다. 시안을 출발하여 란저우를 거쳐 둔황에 이르면 한족문화와 회족문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혼합문화를 경험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 신장(新疆) 지역 깊숙이 자리 잡은 투루판에 이르면 이제 회족문화가 한족문화를 압도한다. 문화가 달라지는 만큼 기후와 풍광도 따라서 달라진다. 투루판은, 해수면보다 280m 낮아 사해(死海) 다음으로 해발고도가 낮은 지역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분지여서 투루판은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투루판의 더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어린 시절 우리 집 서가 한 켠??빙?뼈繭遮?소설이 꽂혀 있었다. 1976년에 신문출판사에서 발행한 상하합본 완역판이다. 앞표지에는 제법 멋을 부린 일본여성이 벤치에 앉아 웃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고, 뒤표지에는 구도를 고려한 것 같지 않은 설산(雪山) 사진이 실려 있다. 어디를 보나 품위 있는 책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이 품위 없는 책이, 당시 책께나 읽는 집 서가에는 한 권씩 꽂혀 있었다. 그만큼 이 책은 당시에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서점가를 풍미한 소설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수십 년 동안 여러 차례 영화와 드라마로 각
에치코 유자와를 빠져나와 니가타와 아키타를 거쳐 오 노 본선 열차를 타고 가나기로 향했다. 가나기……. 다자이 오사무의 고향이다. 쓰가루 지방의 몰락 귀족의 후예로 전 후 일본의 상처를 대변했던 작가다. 1940년대 초, 일본인 들은 제국주의 전쟁의 광풍(狂風) 속에서 수많은 비인간적 행위를 자행하면서도 고개를 숙일 줄 몰랐다.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일왕(日王)의 처참한 목소 리는 그러한 일본인들의 정신을 공황 상태로 내몰았다. 이 때 다자이는 한 개인의 절망을 절망 그대로 솔
지난 겨울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동북부 지방을 거쳐 북해도 끝까지 두루 둘러보았다. 북구(北歐)와 같은 눈경치로 유명한 지역이니만큼 눈을 실컷 보고 싶었다. 나는 나이 쉰이 넘었어도 마치 어린아이처럼 여전히 눈이 좋다. 명색(名色)이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눈 구경을 가는 참에 다른 근사한 구실이 있었으면 더욱 좋겠다 싶다. 해서 겸사로 구실 삼아 눈의 마을을 대표하는 일본의 세 작가에 대한 문학적 탐색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인간실격」의 다자이 오사무, 「빙?뮌?미우라 아야코…&h
“향기로운 MJB의 미각을 잊어버린 지도 이십여 일이나 됩니다. 이곳에는 신문도 잘 아니오고 체신부는 이따금 ‘하도롱’* 빛 소식을 가져옵니다.” 이상(李箱)은 1935년 「산촌여정(山村餘情)」의 서두를 이렇게 썼다. 「산촌여정」은, 폐병을 앓던 이상이 요양을 위해 친구의 고향인 평안북도 성천에 갔던 경험을 쓴 수필이다. 신문, 하도롱과 더불어 MJB(커피)는 도시를 상징하는 어휘들이다. 신문이 오지 않을 정도로 궁벽한 성천에서 하도롱 빛의 도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이상의 모습이
1. 노인탁 기자가 추천하는 영화 「글래디에이터」 러셀크로우의 몰입감 넘치는 연기, 영화 음악가 한스 짐머 특유의 웅장한 음악, 그리고 리들리 스콧의 완벽한 연출이라는 3박자가 적절하게 잘 버무려진 이 영화를 항공대생들에게 추천하고자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12년에 걸친 게르마니아 정벌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다뉴브 강가의 전투를 배경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이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막시무스(러셀크로우)는 그간의 업적으로 인해 황제의 총애를 받아, 다음 왕위의 후계자로 정해진다. 이에 격분한 코모두스(황제의 아들)는
시안, 란저우, 자위관(가욕관, 嘉峪關)을 지나면서 풍경이 바뀌고, 도시 외관이 달라졌으며, 무엇보다 중국 한족(漢族)과는 다른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시안은 한족 문화의 정수(精髓)를 담고 있는 도시이다. 란저우에 오니 회교도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아침에 역 앞에서는 회교도들이 분주히 회교도 음식 ‘란’을 팔고 있었다. 한족들도 그것을 즐기는 듯했다. 자위관에 이르자 낯선 사막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하늘 아래 지평선이 펼쳐졌다. 본격적으로 비단길 여행이 시작되고 있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둔황(敦煌
약 10년 전부터 커피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처음에는 볶은 원두커피를 사다가 갈아서 내려 마셨다. 콜롬비아 수프리모, 자메이카 블루 마운틴, 하와이언 코나, 예맨 모카 마타리…….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마시면서 커피의 맛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생두를 직접 볶아 마시기로 결정했다. 생두를 수망핸디로스터기에 넣고, 그것을 센 불 위에서 쉬지 않고 흔들어주면 약 10분 쯤 지나서, 타다다닥하고 콩 볶는 소리가 나면서 그윽한 커피향이 세상에 퍼진다. 이른바 1차 크랙이다. 그리고 약 5분쯤 약한 불 위에서 흔
지난 8월 28일 가수 조동진이 저 언덕을 넘어갔다. 향년(享年) 70세. 언제부터인지 그의 이름 앞에는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조동진의 ‘행복한 사람’, ‘겨울비’, ‘나뭇잎 사이로’, ‘제비꽃’, ‘어떤 날’ 등의 노래들은, 우리시대 젊은이들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의 숨결이었다. 조동진은 가수로서도 그러하지만, 프로듀서로서도 큰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수많은 실력파 가수들을 발굴하여 키웠고 선배가수로서 후배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록그룹 ‘들국화’, 하덕규와 함춘호가 결성한 듀오 ‘시인과 촌장’, 조
방학 중에 비단길을 여행했다. 시안에서 란저주, 가욕관, 둔황, 투루판, 우루무치, 쿠처, 카슈가르를 거쳐 타슈쿠르간에 이르렀다. 타슈쿠르간은 해발 3500미터 파미르고원 한 복판에 자리한 파키스탄 접경의 중국 마을이다. 실크로드라고 더 많이 부르는 비단길은 통상 시안에서 시작해 로마에 이르는 중세 무역로지만, 백제나 신라 심지어는 일본에까지 이르는 장대한 길이니 내가 지나간 길은 실제 비단길의 허리정도를 더듬었다고 하겠다. 당(唐) 현장(玄奘)이 불경을 얻으려 지나갔고, 신라의 혜초(慧超)가 깨달음을 위해 가서 돌아오
지난 주 『항공대신문』의 「북 카페」라는 작은 난(欄)에 향수라는 책 소개가 실렸다. 책의 내용은 감춘 채, 그 매력만을 살짝 드러내 보여주려는 의도였을까? ‘파리의 악취’, ‘악마의 선물’, ‘향기’, ‘아이러니’, ‘인간의 냄새’, ‘엽기적인 살인사건’, ‘욕망과 잔혹함’ 등의 자극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어구들로 채워진 세 문장만이 이 책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 위에 실린 책의 표지그림이 작아서 작가 이름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책을 읽어 본 이가 아니라면, 그 내용을 짐
1980년대 초반,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의 청소년들이 그랬듯이 나도 그때 유행하던 팝송을 즐겨 들었다. 그러다가 비틀즈라는 이름을 알게 되어, 레코드점에 가서 비틀즈의 'Let It Be' LP를 샀다. 집에 돌아와 기대에 차서 음반에 바늘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대실망이었다. 한마디로 그것은 너무나 평범했다. 비지스의 간드러진 가성 보컬이나 아바의 흥겨운 멜로디, 퀸의 현란한 록비트를 즐기던 내 귀에 'Let it be'는 시시하게 들렸다. 나는 이 음반을 한쪽 구
아침 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질 때면, 가끔 나는 학생회관 식당 옆 야외 공연장에 설치된 나무 피크닉 테이블에서 그라찌에 커피를 즐기곤 한다. 때때로 운이 좋은 날이면 학생회관 3층 어디쯤에서 흘러나오는 재징유의 트럼펫이나 섹소폰 연주를 얻어 들을 수도 있다. 아마도 거기에 음악동아리 학생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연주 연습실이 있는 모양이다.작년 초가을이었을 것이다. 토요일이었던가? 한가한 기분에 젖어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항공대 학생이라고 여겨지는 청년 둘이 다가와 옆 테이블에 앉았다. 이내 한 청년이 바이올린을 꺼내 들더니
내일 죽을 예정인 사형수가 독자에게 자신의 범행을 고백한다. 그는 검정색 고양이를 기른다. 그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애완동물이며, 놀이동무다. 폭음(暴飮)으로 그의 성격은 변화한다. 그는 변덕이 심하고 화를 잘 내며, 급기야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는 증오심에 휩싸여, 고양이의 한쪽 눈을 도려내 버리고, 고양이를 밧줄에 목매어 죽여버린다. 그날 집은 화재로 불타버리고 지하실 벽에는 고양이 모양의 기이한 화인(火印)이 선명하게 남는다. 그는 길에 서 또 다른 검정색 고양이를 주어다가 플루토라고 이름 짓고 기른다. 녀석은
회화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시계를 그린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고집」이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달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심취하여 무의식의 세계를 화판에 펼쳐 놓는다. 이른바 초현실주의 회화이다. 초현실주의는 문인과 화가를 중심으로 20세기 초반에 불꽃처럼 일어나서 풍부한 암시를 던졌던 문예운동이다. 화가로는 달리를 포함하여 르네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 호안 미로 등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의식 저편에서 꿈틀거리는 심연의 기억들을 몽상적 이미지로
'저항의 상징'도 아닌, '시대의 양심'도 아닌,밥 딜런2016년 10월 13일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밥 딜런을 선정했다. 수상자 발표 이후 한동안 밥 딜런은 아무런 공식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초조해진 한림원 측은, 그가 오만불손하다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노벨상의 권위에 먹칠을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한림원의 태도에서는 초조한 심경이 역력히 드러났다. 일각에선 밥 딜런이 수상을 거부할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이도 있었다. 러던 밥 딜런이 수상에 대한 의견을 개진했다. 그는 “말문이 막힌다
건강한 욕망이 살아 숨 쉬는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유산, 어린 시절 을 읽으면서, 그것이 그림이 많은 동화집인 줄로 착각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은 독일의 언어학자이며 민담수집가인 그림(Grimm) 형제(형은 야콥, 동생은 빌헬름)가 1807년부터 1857년까지 독일에 널리 퍼져 있는 민담을 수집해 모은 책으로, 그 원제는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날이야기:Kinder-und Hausm?rchen이다. 이 책은 200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하지만
말하는 토끼 회중시계를 들고 달리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2년, 어린이를 좋아했던 루이스 캐럴은 영국 이시스 강가에서 로리나, 앨리스, 에디스에게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이 세 자매는 루이스 캐럴이 수학과 교수직으로 있던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 대학 리델 학장의 딸들이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세 자매 중 한명인 앨리스다. 캐럴은 리델 학장의 둘째 딸 앨리스를 모델로 이야기를 꾸몄다. 이 이야기는 1865년 한권의 책으로 묶여져 세상에 나왔다. 이상한 나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