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방학에 동남아시아를 두루 주유(周遊)했다. 베트남을 남(南)으로 종주하고, 캄보디아를 서(西)로 횡단하고, 다시 태국 북쪽 끝 국경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역시 절정은 앙코르 와트였다. 베트남 ‘후에’의 황릉들이나 태국의 ‘수코타이’ 유적도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지만, 앙코르 와트야말로 단연 압권이었다. 대개 기대가 크면 실망하게 마련이지만, 앙코르 와트는 기대 이상이었다.

 9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시기, 크메르인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앙을 지배하며 대제국을 일으켰다. 크메르인은 앙코르 지역에 거대한 유적 도시를 건설한다. 그 도읍의 이름이 앙코르다. 앙코르 와트는 그 유적 중 가장 대표적인 힌두 석조 사원이다. 앙코르 와트는 1112년부터 1152년까지 크메르 제국을 통치했던 수리야바르만 2세 때 건설되었다. 1500m×1300m의 장방형 외벽 안에 거대한 3층 사원을 건축했다. 중앙 탑 주위에 네 개의 탑을 세워 올렸다. 외벽 바깥은 너비 190m의 해자(垓子)가 둘러싸고 있고, 건물 벽면은 정교한 부조(浮彫)로 장식했다.

 이 유적을 대하는 이는 대개 그 규모에 압도되고 그 정교한 조각에 경의를 표하지만, 나는 앙코르 와트의 아름다움이 다섯 개의 탑에서 우러난다고 말하고 싶다. 이 다섯 탑은, 힌두교에서 산과 대륙에 싸인 메루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 중앙 탑에는 한때 황금 비슈누(힌두신) 상이 있었다고 한다. 5일 동안 앙코르를 둘러보았는데, 그 사이 앙코르 와트에 두 번 들렀다. 일출을 보러가서 오전 내내 다섯 개의 탑만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지만 좀처럼 그 아름다움이 잡히지 않았다. 사원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다섯 탑은 신비로운 매력을 지니고 있다.

▲ 일출, 앙코르 와트

 다섯 탑은 사원 중앙에 우뚝 솟아 웅장한 건축물의 중심을 잡고 서있다. 탑은 가까이에서 보면 갖가지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조금 떨어져서보면 마치 거대한 꽃봉오리 같다. 멀리서 보았을 때, 주위 건물이나 꽃, 나무들과 어우러진 조화미도 좋다. 일출 때, 태양의 역광을 받고 동서 호수에 비친 다섯 탑의 모습은 정말 일품이다. 하지만 어디에서 보나 다섯 탑의 배열 자체가 만들어내는 단순미는 각도와 거리에 관계없이 완벽하다. 보면 볼수록 새로운 아름다움이 새록새록 샘솟는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온몸이 그리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앙코르에서 앙코르 와트만큼이나 여행자들의 발길을 끄는 유적이 타 프롬(Ta Prohm) 사원이다. 사원에 날아든 판야나무 씨앗이 사암(砂巖)으로 만든 석벽에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나무들로 자라 사원 전체를 삼켰다. 나무뿌리가 파고들며 한편으로 석조 사원을 파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원을 지탱하고 있다. 그러면서 천년을 견뎠다. 어쩌면 판야나무 덕택에 오늘날까지 이 사원이 무너지지 않고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이 기이한 폐허 유적은 영화 「툼 레이더」의 촬영지가 되었고, 이를 소재로 김영하는 단편소설 「당신의 나무」를 썼다.

 바이욘(Bayon) 사원도 앙코르를 대표하는 유적 중 하나다. 사면을 거대한 얼굴로 깎아 만든 석탑이 피라미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 사원을 건축한 자야바르만 7세는 크메르 제국의 국교를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꾸었다. 그래서 이 불상의 모습이 왕의 얼굴에서 모사했다고 추측한다. 하기는 너그러운 눈매와 큼지막한 코 그리고 두툼한 입술은 불상의 모습이라기보다 후덕한 왕의 모습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앙코르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바이욘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그것을 앙코르의 얼굴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크메르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앙코르 전체가 밀림 묻혀 세인들의 관심에서 사라지게 된다. 1860년 프랑스 탐험가 앙리 무오는 밀림 속에서 잠자고 있던 이 유적지를 깨워 유럽인들에게 알린다. 이는 도리어 앙코르 유적지 약탈의 서막(序幕)이 된다. 1878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크메르 예술이 전시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그리하여 앙코르 유적지는 보물수집가들의 표적이 된다. 양심적 지식인 프랑스 작가로 알려진 앙드레 말로도 부조 벽돌을 훔치다가 문화재 밀수라는 죄목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앙코르 유적은 크메르 제국의 국교가 힌두교에서 불교로 전환되는 시기에 건설되었기에, 종교적 갈등으로 인하여 유적지의 많은 불상들이 옛날에 파괴되었다. 밀림에 방치되어 수백 년 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 19세기 서양에 알려지면서 약탈의 시대가 열린다. 중앙 탑에 있었다는 황금 비슈누 상은 행방이 묘연하다. 폴 포트 정권 하에서 크메르루주는 여기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오늘날 캄보디아는 이 중요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관리할 여력이 없다. 다행히 199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적에 지정되는 동시에, 위기에 처한 유적 목록에도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한쪽에서는 허물어지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저작권자 © 항공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