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죽음을 앞둔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 오른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 “보여줘요 내 죽음이 갖게 될 의미, 알려줘요 내 죽음이 갖게 될 영광”, “헛된 죽음 아니란 걸 보여줘 제발”. 예수는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왜 자신이 죽어야 하며, 나의 고통과 죽음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소리치고, 분노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받게 된다.

 드라마 <비밀의 숲>의 최종화에서 이창준은 몸을 던지기 전, 아내에게 유서를 남긴다. 그는 유서에서 “부정부패가 해악의 단계를 넘어 사람을 죽이고 있다. (중략) 무너진 시스템을 복구시키는 건 시간도 아니요, 돈도 아니다. 파괴된 시스템을 복구시키는 건 사람의 피다.”라는 말을 남기고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둔다.

 위의 두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와 배경은 각기 다르지만, 작품의 절정과도 같은 이 장면은 한 가지 공통된 소재로 엮인다. 그것은 바로 ‘죽음’. 뮤지컬 속 예수와 드라마 속 이창준은 각기 다른 사연으로 살아왔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들은 죽음을 선택하며 이야기의 극적인 반전을 가져온다. 둘의 공통된 선택은 다르지만 비슷한 목적 하에 이루어졌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했으며, 이창준은 피를 흘림으로 부정부패의 그 악독한 고리를 끊어내고자 했다. 자신의 죽음이 세상에 미칠 긍정의 파장을 소망한 채 정작 자신은 그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늘 그렇듯, 그들이 소망했던 세상의 변화와 함께 막을 내린다.

 본래 생물은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죽어야겠다는 욕망보다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훨씬 더 크며, 이는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유전자 안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때로 인간을 비롯한 일부 생명체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뜻을 드러내기도 한다.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몇몇 학자들은 ‘사회적인 교류 유전자가 결여되어있는 극단적 이기주의 유전자 개체가 도태되기 위한 행위’로 위와 같은 사례를 분석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이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경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유전인자를 공유하는 타 개체의 생존확률을 높이게 되고, 이 판단이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본다면, 이 죽음은 비록 슬프고 안타까우며, 그 과정은 두려움과 고통으로 가득하더라도 그 죽음이 나타내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숭고한 ‘뜻’을 드러내고자 선택한 죽음은 그 뜻이 담겨있기에 무엇보다 고귀하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사회는 죽음의 고귀함과 그 안에 담겨있는 숭고한 뜻을 보기 보다는, 죽음을 일종의 ‘손익(損益)’으로 여긴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내가 얻게 되는 이익은 무엇이고, 그로 인해 내가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인지 계산하기 바쁘다는 말이다. 나의 이득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죽음이 누구의 죽음인지, 나에게 손해를 가져다 줄 죽음은 또 어떤 죽음인지를 잔인하게 구분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삼가 옷깃을 여미기보다, 넥타이를 풀고 소매를 걷으며 목소리를 높이기에 급급하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죽음 앞에 고개를 숙이지 못한다. 아니, 않는다.

 이러한 작태(作態)를 바라보며 이 글을 읽고 있는,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청한다. 자신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고, 모든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고자 했던 예수의 죽음 앞에 슬퍼하는 자들이여, 자신의 피로 사회의 부정부패를 뿌리 뽑고자 했던 이창준의 죽음 앞에 두 손을 모으는 자들이여, 부디 창작물 속 죽음뿐만이 아닌 현실 속 죽음 앞에서도 같은 만큼의 슬픔을 보이기를 청한다. 극도의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지며 보이고자 했던 이들의 죽음, 그 죽음 속에 담겨있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기를 청한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지 않기를 간곡히 청한다. 죽음의 손익을 따지지 않고, 경중(輕重)을 재지 않기를 부탁한다. 안타까운 죽음에는 안타까워하기를, 가슴 아픈 죽음에는 가슴아파하기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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