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제 편집국장

 

지난 2016년 한국항공대에 입학, 2017년 한국항공대학교 신문사에 수습기자로 들어와 정기자, 선임기자를 거쳐 2019년 편집국장에 자리에 앉은 사람. 비행기라고는 제주도 여행을 갈 때나 탔으며 비문학을 해부하는 재미에 국어교사를 꿈꿨고, 2009년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을 전하던 짜릿한 목소리에 매료되어 중계석을 바라봤던 사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졸업을 앞둔 채, 이젠 공군 장교의 길을 눈앞에 둔 사람. <오진제의 인터스텔라>는 두 편에 걸쳐 이 행성을 탐험해보기로 했다.

 

<오진제의 인터스텔라>.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 같습니다. <김지수의 인터스텔라>에서 따온 건 아닌지요?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맞습니다. 조선일보의 코너 중 하나인 ‘김지수의 인터스텔라’에서 빌려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인터뷰이(interviewee)의 이야기도 참 좋았지만, ‘인터스텔라’의 뜻풀이가 아름다웠던 게 결정적이었어요. ‘나’라는 행성과 또 다른 누군가의 행성이 만나 그사이를 오가는 물음과 답. 이걸 따라 지었습니다.”

 

고등학생 때까지 항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진로를 정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국어교사와 스포츠캐스터. ‘말’을 업으로 삼는 직업을 꿈꾸던 학생이 ‘항공’의 길을 걷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전 중고등학교 6년 내내 항공의 ‘항’도 모르던 학생이었어요. 수시 원서 6개도 모두 국어국문학과와 국어교육과로 넣었지요. 나름 ‘안전빵’으로 넣으려 했던 건데, 전부 1차도 못 통과하고 떨어졌어요. 만일 그때 하나라도 붙었더라면 지금 이곳에 없을 수도 있겠네요. 어쨌든, 시간이 흘러 수능을 치르고, 대학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일단 친구들과 제주도와 부산을 갔습니다. 그때였던 것 같아요. 김포에서 제주로, 제주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김포로 세 번 비행기를 탔는데, 문득 공항에서 일하는 게 멋있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때 항공대를 알게 돼서 모의지원을 했고, 이게 웬걸. ‘안정’이라고 뜨는 거예요. 수시가 떨어졌으니 정시에 ‘몰빵’하자고 생각한 게 빛을 보는구나 싶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수시에서 6개 모두 떨어진 게 신의 뜻이 아니었나 싶어요.”

 

후회는 없었습니까?

“솔직히 한동안은 후회했습니다. 막상 들어오긴 들어왔는데, 소위 ‘항덕’들도 많았고, 항공우주캠프에 참가한 적도 있는 동기들 사이에서 공부하는 게 어려웠어요. 필기를 하면서도 내가 뭘 하는 건가 싶기도 했고, 그저 수업이 끝나면 화씨에서 맥주 마시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4년만 버티자는 마인드였지요. 4년을 잘 버티고 대학원에 가서 국문학을 배우자. 그리고 국어교사든 스포츠캐스터든 그 길을 걷자. 이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이후에는 마음이 조금 바뀌었나요?

“바뀌었죠. 사람이 참 신기한 게, 4년 동안 억지로라도 재미를 붙이려 하니까 붙긴 붙더라고요. 항공기를 띄우는 원리와 이를 위한 과정, 그 뒤에서 묵묵히 제 일을 하는 사람들. 내가 그중 한 부분이라는 생각에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죠. 그렇게 운항관리사 자격증에 도전해보고, 공군 장교에도 도전해보고, 그렇게 흘러가더라고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공부하기 싫었던 1학년 때 학점이 제일 좋습니다. 재미를 붙이면서는 이상하게 학점이….”

 

신문사에 들어온 것도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작년에 국장을 맡았던 휘권이형의 영향이 컸어요. 좋지 않은 일로 학교가 한 번 들썩인 적이 있는데, 그와 관련된 기사를 쓰는 걸 보고 멋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에 동기들하고 간 MT에서 서로 술에 취해 “들어 와라”하고 “들어 가겠다” 말했습니다. 그렇게 신문사와의 인연이 시작된 거죠.”

 

2년 간 기자 생활의 소회, 졸업을 앞둔 떨림, 그리고 지면을 떠나는 그의 작별 인사는 <오진제의 인터스텔라(下)>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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