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차근호가 만든 ‘이중섭 묘비’, 애타게 그리워하던 두 아들이 새겨져 있다

 세계 곳곳에 유명 인사들의 유해를 모신 공동묘지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의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이다. 여기에는 발자크나 프루스트, 오스카 와일드 같은 작가를 비롯하여, 앵그르, 도미에, 코로, 들라클루와, 모딜리아니 같은 화가, 로시니, 비제와 같은 음악가, 그리고 영화 배우 이브 몽땅, 가수 에디뜨 피아프, 록 그룹 도어즈의 보컬리스트 짐 모리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의 유해가 묻혀 있다. 페르 라세즈에서 가장 많은 추모객이 몰려드는 묘지는 작곡가 쇼팽의 무덤이라고 한다.


 폴란드의 작곡가 쇼팽은, 1830년 스무 살의 나이에 조국 폴란드를 떠나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당시 유럽에는 혁명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고, 폴란드는 러시아의 억압에 신음하고 있었다. 쇼팽이 조국을 떠날 때, 그의 친구들은 은잔에 폴란드의 흙을 담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쇼팽은 그것을 평생 간직했고, 그 폴란드의 흙은 그가 페르 라세즈에 묻힐 때 그의 유해를 덮었다. 평생 조국을 그리워한 쇼팽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 성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었다.


 페르 라세즈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곳이 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이 그곳이다. 여기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을 비롯하여 시인 박인환, 소설가 계용묵과 최서해, 아동문학가 소파 방정환, 화가 이중섭과 이인성, 권진규,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 독립운동가 오세창, 진보정치의 선구자 조봉암 등 우리 역사에 빛을 던진 많은 분들이 잠들어 있다. 도산 안창호, 고하 송진우, 명창 임방울도 여기에 묻혀 있었으나 이들의 묘지는 나중에 국립묘지와 사립공원묘지에 이장되었다. 도산 안창호의 유해는 도산공원이 조성되면서 이장했는데, 여전히 묘지 터와 묘비석은 남아 있다.


 망우산은 1933년부터 서울시의 공동묘지로 사용하기시작하였다. 예전에 어른들은 죽는다는 말을 대신해, “망우리 간다”고 표현했다. 아마도 ‘죽는다’는 말을 입에 담기를 꺼리는 심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망우리는 공동묘지의 상징이며, 죽음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1973년 분묘가 가득 차 더 이상의 묘지 쓰는 것이 금지되었고, 1992년 이곳에 안치되어 있는 한용운 등 유명 인사의 묘지를 중심으로 산책로를 만들고, 곳곳에 정자와 운동 시설을 설치하여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였다. 이제 이곳에는 시민들의 활기찬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주말이면 주차된 자동차가 장사진을 이룬다. 죽은 자의 안식처에 산 자의 쉼터가 더해진 셈이다.


 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나에게 가장 관심이 가는 묘지는 아무래도 만해 한용운의 무덤이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지를 찾아가는 동안 줄곧 그에 대한 생각들이 머리에 맴돌았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기 싫어서 심우장(尋牛莊, 만해 선생의 집)을 북향으로 지었다는 그 의기, 변절한 최남선을 만났을 때 “내가 알던 육당(최남선의 호)은 벌써 뒈져서 장례를 치렀소.”라고 호통을 치던 그 결기, 3·1 운동 후 재판장에서 조금도 굽힘 없이 “조선인이 조선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백번 말해 마땅한 일인데, 감히 일본인이 무슨 재판이냐”라고 일갈하던 그 기개가 머리에 맴돌았다.


 애정으로 말한다면, 가장 보고 싶었던 묘지는 역시 이중섭의 묘지였다. 평안도에서 태어난 그는 6·25 한국전쟁 당시 남하하여 제주도, 부산, 통영 등지를 떠돌았다. 일본으로 건너간 일본인 부인과 두 아들을 그리워하다가 끝내 만나지 못하고 40세의 나이에 쓸쓸하게 저 언덕으로 넘어갔다. 천진난만한 어린이와 게, 당장이라도 콧김을 내 뿜을 듯한 우리나라 소, 돈이 없어 담뱃갑 속 은지에다 송곳으로 눌러 그린 은지화……. 어떻게 이중섭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중섭의 묘지에는 소박하지만 멋스러운 비석이 서 있었다. 거기에는 그가 죽기 전까지 그리워하던 두 아들이 새겨져 있다. 조각가 차근호가 만들었다고 한다. 이중섭 유해의 일부는 일본으로 건너가 가족들 품에 안겼다고 하는데, 그 또한 왠지 내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이 공원에 있는 두 기의 일본인 묘지는 뜻밖으로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사이토 오토사쿠와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지이다. 사이토 오토사쿠는 일제강점기 초기의 산림정책을 담당한 고위 관료다. 그는 식목일을 제정하고 우리나라 산림 녹화 사업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의 업적이란 결국 우리 자연 자원의 수탈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묘비는 다소 훼손되어 있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금 다르다. 그는 우리나라의 민속 예술에 심취해, 그에 대해 깊이 연구했고, 「조선의 소반」, 「조선도자명고」 등을 저술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를 사랑한 나머지 우리말을 하며 한복을 입고 다녔으며, 이 땅에 묻히기를 바랐다고 한다. 조선 민예 연구의 대가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니 머리가 숙어질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무덤에는 싱싱한 꽃과 정종이 놓여 있었다.


 만해 묘지를 찾아가는 동안에는 줄곧 만해 선생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고, 이중섭의 묘지를 찾아가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이중섭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떠돈다. 망우리는 죽음의 공간이면서 삶의 공간이다. 동서고금, 죽음은 삶을 성찰하게 만든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목도하여,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이 탄생했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공간, 죽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공간……. 한 번쯤 망우리역사문화공원을 찾아 산책길을 거닐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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