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준 편집국장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 인터넷에서 유명한 이경규 씨의 어록 중 하나이다. 이 단순한 발언에는 정말로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이번 글에서 필자는 간단하고도 복잡한 의미가 담긴 이 문장에 대해서 다뤄보고자 한다.

 

 아집과 고집불통

 사전에 따르면 아집이란 ‘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입장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자기만을 내세우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물 안 개구리의 고집’이라고 볼 수 있다. 고집불통의 의미 또한 상통한다. ‘조금도 융통성이 없이 자기주장만 계속 내세우는 일’.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서운 이유는 ‘아집’과 ‘고집불통’에 빠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정말로 참된 ‘사실’인지, ‘진실’인지 구별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만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무서운 것은 이런 과정에서 타인의 반대의견과 비판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진실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나 ‘자신을 해치려는 사악한 사람’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왜 생기게 되는 것일까? 필자는 이를 ‘더닝 크루거 효과’의 한 예시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느 특정한 분야에 있어, 지식이 더 많은 사람보다 더 적은 사람이 오히려 자신의 지식 수준에 대한 자신감이 높게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자신의 지식 수준을 과대평가하며 타인의 의견을 무시하는 순간 ‘신념’은 우리의 마음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사실 순화시킨 표현이 ‘신념’이지, 나는 이것을 ‘광신’이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는 전혀 논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논리를 남에게 강요하거나, 스스로가 만든 논리에 잡아 먹혀버리는 행위가 바로 광신이지 않겠는가?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현상은 분야를 막론하고 사회 곳곳에서 나타난다. 극단주의자와 음모론자가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다. 홍역 백신 접종이 백신 회사들의 음모라고 믿는 음모론자들 때문에 일어난 미국에서의 홍역 대유행은 이미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극좌·극우 성향의 극단주의자들 때문에 일어나는 사회 갈등도 꽤나 심각한 수준에 달해있다. 요즘 코로나19의 2차 유행도 비슷하다. 극단 종교주의·극우주의 시위대의 사보타지(고의로 행하는 방해 활동)는 현 의료체계에 큰 구멍을 뚫고 있다. 이들의 믿음은 신념을 넘어 이제는 광신을 향해가고 있다. 보건소에서 검사를 받으면 무조건 양성으로 진단된다며 검사를 거부하는 사람들마저 나오고 있다. 심지어 코로나19 자체가 정부가 만들어낸 허구라는 음모론까지 퍼지고 있다. 일부는 정부에서 코로나19의 책임을 자신들에게 덮어씌우기 위해서 강제로 확산시키고 있다고도 주장한다.

 위에서 말했듯,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생각해보면 이들의 논리가 근거가 부족한 음모론임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신념’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 모두 “저런 건 멍청한 사람들 이야기야”라며 쉽게 넘기곤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아니 ‘신념’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지혜롭다는 이 생각이 우리에게 신념과 광신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그러하다. ‘내가 하는 일은 옳아’라는 발상에 휩싸이는 순간, 나도 아집과 고집불통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나도 아집에 빠진 적이 많다. 안 그래도 평소에 고집이 센 나는 아집에 빠지는 걸 최대한 경계하려고 하지만, 아무래도 난 그렇게 지혜롭지 않은 것 같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은 사실 ‘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라’라는 의미라고 한다. 우리는, 그리고 나는 남들보다 내가 더 똑똑하다거나, 옳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항상 떨쳐내야 한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되뇌자. 뭔가를 확신하고 믿기 전에, 항상 한 발자국 떨어져서 제삼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돌려돌려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 모두 항상 자만하지 말자는 것이다. 자만은 곧 오만으로, 오만은 아집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자조적인 반성이기도 하다.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TV에 나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곧 나일 수도 있다.

 

결국, 가장 부끄러운 것은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고,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 나는 과연 ‘무식’하지도, ‘신념’을 가지지도 않은 사람일까?

저작권자 © 항공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