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파묵칼레, 셀추크, 카파도키아를 둘러보고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와 아테네로 향했다. 비행기 창으로 비치는 에게해의 하늘에 터키의 풍경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갔다. 그 기묘한 자연경관이나 이색적인 투르크의 유적도 눈부셨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가는 곳마다 웅장하게 서 있는 로마 제국의 유허(遺墟)였다. 이탈리아의 로마보다 더 오랜 세월 로마 제국의 명맥을 유지했던 동로마 제국의 흔적이 거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제 역사를 거슬러 서양문명의 시원(始原) 그리스로 간다.

칼람바카의 ‘메테오라 수도원’

 

 과연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까?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하면, 곧바로 메테오라 수도원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메테오라는 14세기에 세워진 수도원 마을이다. 메테오라가 있는 칼람바카는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약 400km 떨어져 있는 궁벽한 곳이어서 교통이 매우 불편하다. 그래서 대개의 여행객들이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패키지로 다녀오는 곳이다. 아테네에 도착하자마자 전철을 타고, 아테네역으로 갔다. 거기서 고속열차를 타고 중간에 내려 다시 완행열차에 올랐다. 칼람바카에 도착하니 벌써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숙소 뒤에 거대한 암벽 산봉우리들이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아! 간밤의 그 괴물이 이토록 산뜻하게 빛날 수 있을까? 500여 미터에 이르는 육중한 회색 사암 산봉우리들이 큰 산을 이루고, 그 봉우리들 위에 수도원을 지었다. 그래서 공중 수도원이라고도 부른다. 메테오라는 ‘공중에 떠 있는’ 이라는 뜻의 그리어다. 지금은 바위를 깎아서 길을 만들어 놨지만, 예전에는 도르레와 밧줄을 이용해야 오를 수 있었다. 아래에서 바라보는 모습도 그러하지만, 위에서 조망하는 풍광은 그야말로 장관(壯觀)이다. 수도원에 오르는 좁은 돌길을 걷자면 나 스스로 은둔의 수도사가 된 듯하다. 수도원 내부의 동방정교 성화(聖畫)가 정겹다. 창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영혼을 씻어준다.

 

 10세기 무렵 투르크의 침략을 피해 동방정교 수도사들은 칼람바카의 바위 동굴로 숨어들어 교회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러다가 14세기에 이르러 수도원이 건축되기 시작했고, 한때는 24개의 수도원을 세워지기도 하였다. 지금은 하나의 수녀원을 포함해 여섯 개의 수도원이 대중에게 공개되고, 하나 더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심하게 훼손되었는데, 1960년대 보수하여 대중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관광객이 몰리면서, 많은 수도사들이 이곳을 떠났다니 그분들께는 죄송하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수도사와 수녀들은 여기에서 동방정교의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다고 한다.

 

 칼람바카에서 이틀을 머물고, 델포이로 향했다. 오늘날 델포이는 파르나서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작은 시골 마을이다. 푸른 하늘과 올리브 나무숲과 바위가 드러난 산은 지중해 지역 특유의 자연경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 떼나 가끔 지나가는 나귀들 그리고 아기자기한 집들에서 소박하나마 여유 있는 삶이 느껴진다. 지금 델포이는 그러한 자연경관과 생활공간이 유적들과 잘 어울리는 평화로운 곳이다.

 

 어느 날 제우스가 두 마리의 독수리를 동서로 날렸다. 독수리들은 각각 세계를 가로질러 델포이에서 만난다. 제우스는 델포이를 세상의 중심으로 선포하고, 거기에서 그의 아들 아폴론이 살게 한다. 그래서 여기에 아폴론 신전이 있고, ‘옴파로스’라는 돌이 서 있다. 2,500여 년 전 델포이는 아폴론의 신탁을 받기 위해 온 세상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지금도 델포이에는 최초의 여사제가 아폴론의 신탁을 받았다는 바위가 있다. 신전을 찾은 사람들은 바위에 격언을 새기기도 했다.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잘못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도 여기에 새겨있었다고 한다.

 

 아폴론이 거대한 뱀 ‘피톤’을 물리친 기념으로, 올림픽의 전신인 델포이 제전이 열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제전의 우승자에게는 상금 대신 청동 월계관과 자신의 조각상을 성소(聖所)에 세울 자격만이 주어졌다고 한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경기장에서 육체의 기예를 겨루고, 델포이 극장에서 음악에 맞춰 시를 읊으며 연극을 상연했으리라. 델포이 제전은 진정한 의미에서 스포츠 정신과 예술 정신이 어우러진 문화행사였을 것이다. 델포이에는 지금도 제전이 이루어졌던 경기장과 델포이 극장의 유적이 남아 있다.

델피 박물관의 ‘옴파로스’

 델포이 유적에는 ‘옴파로스’라는 돌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 진짜 유적은 델포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도 그리스 문명을 동경했던 로마인의 모작(模作)이라고 한다. 옴파로스는 ‘배꼽’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델포이를 세상의 ‘배꼽’, 즉 세상의 중심이라 믿었다. 오늘날까지 서양에서는 그리스를 서양문화의 뿌리로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러니 서양인들에게 델포이는 세상의 중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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