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준 편집국장

 독자 분들은 추석 연휴를 어떻게 보냈는가? 부디 넉넉하고 풍성한 한가위가 되었길 바란다. 필자는 추석 연휴 동안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이 있다. 바로 9월 30일 방영된 가수 나훈아의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콘서트이다. 

 처음에는 그냥 친구들과 카톡하면서 별 생각 없이 봤었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나훈아에 빠져들게 되었다. 가수 나훈아는 올해로 만 73세이다. 이러한 나이를 먹고도 끊임없이 신곡을 발표하고, 자신의 팬들을 위해 실력을 갈고 닦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만 20세의 어린 나도 매일 흘러가는 일상을 그저 반복하면서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는데, 가수 나훈아는 ‘세월의 모가지를 비틀어서 끌고 가고’ 있다.

 나훈아 왈, 매일 똑같은 일만 반복하면 세월에 끌려가는 것이고, 세월이 훌쩍 지나가는 것이란다. 가끔은 평소에 안하던 일도 해주고 새로운 일을 해줘야 세월이 느리게 간단다. 나의 지난 추석 연휴는, 아니 지난 한 해는 어땠는가? 코로나를 핑계로 매일 집에서 놀고만 있지 않았는가? 몸을 가꾸겠다며 세운 운동 계획은 어쨌는가? 참으로 반성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번 방송이 단순한 그냥 노래 콘서트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나 자신을 알게’해준 기회였다. 교훈뿐 아니라 ‘가황’의 목소리는 노인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만큼 강하게 울려펴졌다. 이러한 감동을 독자 분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본질을 알라’

 위에서 말한 콘서트에서는 나훈아가 여러 ‘소신 발언’을 했다하여서 큰 이슈가 되었다. 정치권에서는 연일 나훈아의 발언을 언급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며 우겨댔다. 과연 어떤 발언이었기에 그럴까? 주로 화제가 되는 발언들은 다음과 같다.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왕이나 대통령은 보지 못했다” △“나라를 지킨 건 왕이나 대통령이 아니라 보통 우리 국민이었다”

 위와 같은 발언은 얼핏 보면 현 정권을 비판하는 발언으로 보인다. 그러나 필자가 직접 본 공연에서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훈아의 저런 발언들은 코로나19로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들을 칭찬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과거 임진왜란 때의 의병부터 수많은 독립투사들, 그리고 근래에 들어서는 IMF를 이겨낸 우리 국민들, 코로나19와 맞서 싸우는 우리 대한국민들을 응원하는 맥락에서 나온 발언인 것이다. 즉, 이를 두고 ‘나훈아가 문재인 정권을 비판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야 말로 앞뒤 문맥을 다 자른 ‘악마의 편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웃긴 사실은, 사실 나훈아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발언을 ‘앞뒤 자르고’ 언급해서 기삿거리로 만들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내보내달라고 방송 전 밝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과 같은 사태가 발생했다니, 정말 웃긴 일이다.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제 멋대로 ‘아전인수’격으로 행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나훈아의 발언을 두고 일어난 촌극이 전부가 아니다. 이번 통신비 지급 논란과 월북 공무원 사건을 한번 살펴보자.

 통신비 지급을 두고 여야 간 다툼이 굉장히 거셌다. 그중 가장 거셌던 문제는 ‘왜 통신비를 지급하느냐’는 문제였다. 정부와 여당은 코로나19 유행 기간 동안 비대면 활동 때문에 통신량이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증가한 통신비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서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두고 또 여야 간 무의미한 정쟁과 말다툼이 매우 길게 늘어졌다. 그 동안 더 중요한 안건들이 미뤄진 건 덤이다. 그런데 이런 말다툼이 이어지면서, 문제의 본질은 흐려졌다. 문제의 본질은 ‘재난 지원금을 어떻게 주냐’지, 통신비에 얽매일 일이 아니다. 여당과 정부에서는 ‘2차 지원금은 전 국민 대상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지만, 여론 때문인지 아니면 실제 경제 이익 때문인지, 재난지원금을 다시 지급 하여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이 내뱉은 말을 취소할 수는 없으니, ‘통신비 지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재난지원금이라고 2만원을 지급한다면 오히려 큰 반발이 일어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적당한 대외명분인 것이다. 야당도 참 답답하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을 지적하여야지, 서로의 체면만을 신경 쓰는 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월북 공무원 사살문제도 비슷하다. 문제의 본질은 ‘우리나라의 국민이 북한에 의해 총살당하고, 시신은 불태워졌다’이다. 그런데 여야는 사건 초기 공무원의 월북여부를 두고 한참을 다퉜다. 물론 월북인지 아니면 실수로 떠밀려 간 것인지가 사건에 영향을 끼치는 게 맞기는 하다. 그러나 사건 해결과 북한의 책임을 묻는 것 보다 중요한 일인가? 월북을 시도하였다 하더라도, 그 공무원은 우리나라의 국민이다. 그 어느 ‘계몽군주’ 가, 그 어느 ‘국가’가 국경을 건너온 민간인을 총살하고 시신을 훼손시키는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처럼 본질이 흐려지는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빈번하다. 본질이 흐려지고 ‘싸움을 위한 싸움’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는데, 왜 ‘본질을 알라’고는 하지 않았을까? 고대의 현인 간 다툼에서는 체면치레보다 실익을 위해 서로 힘을 합치는 행위가 당연했나보다. ‘테스형’은 설마 본질도 무시하고 서로의 자존심 싸움만 하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하지 않았을까? 꼭 한번 얼굴 보고 물어보고 싶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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