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포이를 떠나 남으로 향해 두 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가니 아테네다. 아테네에서는 어디서나 파르테논 신전이 눈에 띈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도시 한가운데 있는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신전을 건축했다. 아테네에서는 아크로폴리스보다 높은 건물을 세울 수 없다고 한다. 아테네 시민들로 하여금 이 신전을 바라보며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를 기억하라는 뜻일 게다. 유럽문화의 상징이라는 뜻에서 유네스코는 이 파르테논 신전을 세계 문화유산 1호로 지정했다.

 

 왜 하필이면 아테나를 수호신으로 삼았을까? 아테나는 지혜와 전쟁의 여신이다. 아마도 당시 아테네인들에게 중요한 가치가 삶의 풍파를 헤쳐나갈 지혜와 도시 수호 전쟁의 승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가 아닐까? 아테나는 또 다른 전쟁의 여신 아레스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다. 아레스가 호전적이고 잔인한 성격을 지녔다면, 아테나는 평화를 위한 불가피한 전쟁만을 행한다. 아마도 그것은 용기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지혜와 용기를 가슴에 새기고, 다시 역사를 거슬러 크레타로 간다. 크레타는 그리스에서 남쪽으로 160km쯤 떨어진 유럽 최남단의 섬이다. 미노타우르스의 전설이 깃든 크노소스의 궁전이 있는 곳, 자식들을 삼키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피해 제우스가 자라난 동굴이 있는 곳, 그리스 초기의 미케네 문명을 전파한 미노아 문명이 꽃피운 섬이다. 하지만 내게는 무엇보다 크레타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태어나고 자라고 잠들어 있는 곳이다.

 

 1900년 영국의 고고학자 에번스가 크노소스 궁전 유적을 발굴하기 전까지 미노아 문명이란 그저 전설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유적의 발굴로 인하여 유럽문화의 씨앗이 여기에서 싹텄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엄청난 기대를 안고 유적 안으로 들어갔지만, 보이는 것은 폐허뿐이었다. 미노타우르스의 미궁 같은 신비로운 유적은 그 흔적만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다만 몇몇 벽화와 도기들이 당시 사람들의 삶을 웅변해 주고 있었다.

크레타 섬에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

 묘하게도 그 그림들을 보니 이집트 벽화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 크레타인은 저 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까지 왕래하며 지중해의 해양문화를 일구지 않았던가!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북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시로코우 바람’을 맞으며, “죽기 전에 에게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다. 아마도 시로코우 바람을 타고 지중해를 건너온 이집트 문명의 씨앗이 크레타에 내려앉아 뿌리를 내리고 싹이 터 미노스 문명을 일구고, 그 문명의 씨앗이 다시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 본토로 날아가 미케네 문명을 탄생시켰으리라.

 

 카잔차키스는 1883년 크레타의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났다. 당시 크레타는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는 1912년 발칸전쟁이 일어나자 육군에 자원입대하였다. 전쟁의 승리로 크레타는 독립을 쟁취하여 그리스로 편입되었다. 1914년 이후 카잔차키스는 유럽과 북아프리카 전역을 다니며 여행을 하였다. 여행은 그의 인생에서 방황이자 구원의 길이었다. 1917년, 크레타에서 알렉시스 조르바와 갈탄 광산사업을 벌인다. 그 경험이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명작을 낳는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소설속의 ‘나’가 조르바를 만나 갈탄 광산사업을 벌였으나 실패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감동은 누가 뭐라고 해도 조르바의 인간적 매력에서 비롯된다. 조르바는 산투르(그리스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조르바 춤을 춘다. 세상의 모든 여인들을 자기 애인으로 여기는 바람둥이, 도자기를 굽다가 걸리적거린다고 왼손 집게손가락을 손도끼로 자르는 인간, 부당한 일에는 목숨을 걸고 참견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비분강개, 크레타의 독립을 위해 수많은 터키인을 죽이고서 살아남은 터키 아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자기 지갑을 몽땅 털어버리는 인간, 그것이 바로 조르바다.

 

 ‘나’는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母胎)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고 술회한다.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라고 조르바는 말하자,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라고 ‘나’가 묻는다. 그러자 조르바는 대답한다. “자유라는 거지!”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실제 조르바에 대해서 “힌두교에서는 구루(導師)라고 일컫고, 아토스 산의 수도승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삶의 길잡이를 선택하는 문제라면 나는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했을 것”이라고 한다. “종이를 씹고 잉크를 대가리에 뒤집어쓴” 책상물림 백면서생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만나 잉크와 종이에서 자유로워졌는지도 모른다. 아니 결국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쓰면서 또 다른 조르바가 되었을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으로 인하여 교회로부터 파문당해서 그리스 본토에 묻힐 수 없었다. 어쩌면 다행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시로코우 바람’이 불어오고 에게해가 보이는 고향 크레타 언덕에 묻혔으니……. 그의 묘비명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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