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지하철역에서 내려, 궁을 끼고 돌아 약 500m를 걸으면 ‘라 카페’가 보인다. 박노해 사진전 <길>이 열리고 있다.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부암동에 있던 ‘라 카페’가 2년 전 경복궁역 근처로 옮기면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 잦아진 듯하다.

 

 전시장에 들어서, 사진을 둘러보니 모두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다. 차마고도의 석두성에서 농사짓는 할머니가 수확물을 팔러 마을을 나선다. 인도의 바닷가 마을의 여인들이 아이들과 모여 앉아 정담을 나누고 있다. 아침에 ‘빠이(인도 차)’를 끓이는 찻집 아저씨, 천진난만하게 뭐라고 신나게 지껄이며 들판을 걷는 두 소년, 땅따먹기하는 아이들, 목숨을 걸고 국경 담을 끼고 걸어서 등교하는 팔레스타인 아이들 그리고 이라크 전쟁의 상처가 훑고 지나간 사막에 노천카페가 폐허처럼 남겨 있다. 사진들 속에서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이 묻어난다.

 

티베트 초원의 강-박노해

 헌데 유독 내 발걸음을 묶어두는 사진 한 장이 있다. ‘티베트 초원의 강’, “황하가 처음 몸을 틀어 아홉 번 굽이쳐 흐르는 루얼까이 초원의 강물 위에 붉은 석양이 내린다. 관광객들은 절경을 촬영하느라 분주한데, 종일 손님을 태우지 못한 티베트 여인이 무거운 어깨로 저녁 기도를 바친다.” 이 사진 속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쯤 있을까? 저 관광의 무리에 섞여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을까? 기도하는 여인처럼 무언가 간절한 기도를 올릴까? 풍경 뒤에서 카메라의 시선을 던지고 있을까? 아니면 저 말처럼 무심히 주인을 바라보고 있을까? 혹은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기만 할까?

 

 1984년 한 권의 시집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노동자 박기평이 박노해라는 필명으로 낸 『노동의 새벽』이 바로 그것이다. 박노해란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의 준말이다. 이 시집은 신군부정권의 금서 조치에도 불구하고 100만부 이상 팔려나갔고, 군부독재에 대한 항거에 불을 댕겨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박노해는 ‘얼굴 없는 시인’로 불리며 지하에서 군사독재와 싸웠다. 7년간 수배 끝에 사노맹(남한 사회주의 노동자 동맹) 사건으로 검거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이제 ‘박노해’라는 이름은 노동자 시인 혹은 사회주의 혁명가의 대명사가 된다.

 

 박노해는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 사면 조치로 7년 6개월 만에 출소하고,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복권된다. 하지만,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국가의 보상도 마다하고 새로운 삶의 길을 걷는다. 수감 중에 “정신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지켜 가야 하지만 현실체제로서의 사회주의는 잘못됐다.”고 말한 바 있고, 출소 이후 준법서약서에 서명함으로써 많은 이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혹자는 그를 변절자로 몰아세우기도 하지만, 그의 태도에서는 여전히 인간과 역사에 대한 진정성을 엿볼 수 있다. 그의 변신은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박노해는 2000년에 설립한 비영리사회단체 ‘나눔문화’ 를 통해서 생명과 평화를 위해 작은 투쟁을 전개한다. 나눔문화는 ‘정부지원 받지 않는다, 재벌후원 받지 않는다, 언론홍보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며, 오늘날까지 활동을 유지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카메라를 메고 포화로 이지러진 전쟁의 현장으로 뛰어든다. 그곳에서 그는 “새벽 3시, 조지 부시가 이라크 침공을 선포했습니다. 이라크 아이들이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저를 부릅니다. 폭격의 공포에 떨고 있는 그 곁에 있어라도 주고 싶습니다.”라는 서신을 보내온다.

내 그리운 바그다드 카페-박노해

 이라크와 레바논, 팔레스타인 등지를 떠돌며 카메라에 담았던 사진들은, 2010년 1월, 박노해 첫 사진전 <라 광야> 를 통해 선보인다. 그리고 2012년부터는 ‘라 갤러리’를 열어 지속적으로 사진전을 개최하고 있다. 여전히 박노해는 라이카 M6 카메라를 들고, 인도네시아, 인도, 티베트,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 등 가난과 분쟁의 오지를 떠돌며 사진을 찍고 있다. 이제 박노해에게 노동해방의 시인이나 사회주의 혁명가의 이미지는 흔적처럼 아련히 남아 있다. 그는 사진예술가로 거듭났지만, 그의 모습에서는 도리어 순례자나 구도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번 18번째 전시회의 제목은 <길>이다. 본래 3월 7일까지 전시하기로 되어있었으나 6월 6일까지 연장 전시하니 꼭 한번 찾아가서 박노해 인생 역정과 작품 세계를 음미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지금까지 걸어온 삶의 길을 더듬어 보고, 자신의 현 위치는 어디인가를 가늠해 보고, 또 자기 앞에 펼쳐진 길을 그려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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