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가을이면 고궁에 가서 시도 짓고 그림도 그리는 백일장이 열렸다. 여기에는 전교생이 모두 참가했다. 특별히 실력을 겨루는 행사라기보다는 감수성 교육의 일환으로 열린 행사였다. 귀찮게 여기거나 쓸데없는 짓으로 여기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지만, 나는 백일장이 참 좋았다. 나들이 겸 고궁에 나가 그림도 그리고 시도 지어보고 친구들과 정담도 나누는 것이, 그야말로 나의 감수성을 풍요롭게 했다.

부용지와 주합루

 어느 해인가, ‘창덕궁’에서 백일장이 열렸다. 그때 내 눈에 비친 창덕궁도 그랬지만, 특히 후원의 정경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풀 한 포기 한 포기, 바위 하나하나가 모두 최고의 작품처럼 여겨졌다. 나는 햇빛을 머금고 반사하는 가을의 숲과 연못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황홀했다. 그때의 황홀감을 다시 느껴볼 수 있을까? 지금은 창덕궁 후원 입장이 인원 제한 예약제로 바뀌어 예약이 쉽지 않지만, 엄두를 내어 오랜만에 후원 나들이에 나섰다.

 

 후원 입구를 지나 부용지(芙蓉池)에 이르니 옛 생각이 절로 난다. 학창 시절 내 눈에 비친 이 연못의 아름다운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네모꼴 연못 가운데 동그란 섬이 떠 있다. 섬에는, 선 듯 누운 듯, 푸르른 나무들이 멋대로 자란다. 연못 주위는 다듬은 돌로 둘러쳤는데, 한 모서리에 튀어 오르는 잉어가 부각(浮刻)되어 있고, 한쪽 면에는 부용정(芙蓉亭)이 뭍과 물에 걸쳐 서 있다. 연못에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유교적 우주관을 담았다.

 

 부용정 건너편 언덕에 주합루(宙合樓)가 우뚝 섰다. 거기에는 국가의 부흥을 향한 정조의 열망이 깊이 배어있다. 정조는 이 일대에 규장각을 설치하고 탕평의 정치를 펼쳤다. 정치적 간섭을 받지 않도록 *각신(閣臣) 이외의 신하들은 이곳에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주합루(宙合樓)……, 그 말을 풀어보면 ‘우주와 어우러지는 누각’이다. 정조는, 이곳에, 아니 이 땅에, 조화로운 우주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리라. 그 글씨는 정조의 친필이다.

 

 주합루에 오르는 문에는 어수문(魚水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주합루 곁에 과거시험 본부 역할을 했던 영화당(暎花堂)이 있으니, 이 문은 *등용문(登龍門)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연못에 새겨진 잉어가 영화당을 거쳐 어수문을 통과하고 임금을 알현하여 나라를 일으키는 용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 아닐지? 여기에서 정약용과 같은 대학자뿐 아니라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서얼 출신의 학자들도 활약하였다.

 

 일제는 주합루, 부용정, 서향각만 남기고, 그 밖의 열고관, 대유재, 소유재 등은 모두 없애 버린다. 식민 통치를 위한 역사 연구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 이나마 남긴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당 앞 담 너머 창경궁의 춘당지(春塘池) 춘당대라는 마당이 과거시험장이었는데, 일제가 이 담을 쌓아, 본래 연결되어 있던 창경궁을 분리해 동물원으로 만들기도 했다. 남의 나라 궁궐을 동물원으로 만드는, 그러한 야만성이 제발 이제는 그만 그들의 피에서 씻어졌기를 바란다.

 규장각 언덕 너머에는, 정조의 손자인 효명세자가 독서를 하며 학문을 닦던 *의두합(倚斗閤)과 운경거(韻磬居)가 있다. 단청을 하지 않은 이 건물은 북향이다. 공부가 게을러질까 저어하여 그리 했다니, 학문에 대한 효명의 의지를 알겠다. 그 곁에는 효명세자가 부왕 순조에게 진작례(進爵禮)를 올리기 위해 지은 연경당(演慶堂)이 있다. 진작례란 신하들이 왕과 왕비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행사다. 세자 시절 이미 세도정치를 물리치고 왕권강화를 통해 나라를 바로 잡겠다는 효명의 결심도 알겠다. 이렇듯 지혜롭고 의지 굳은 효명세자가 3년간의 대리청정 끝에 죽고 만다. 안타깝다.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 가면, 존덕정(尊德亭)이 나온다. 겹지붕을 얹은 이 정자에도 개혁 군주 영조의 뜻이 숨어 있다. 존덕정 안에는 영조가 직접 쓴 ‘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제목의 글 현판이 걸려 있다. 여기에는 “세상의 모든 시내는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유일하니, 그 달이 곧 임금인 나이고 너희들은 신하들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거역할 수 없는 정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하다. 천장의 쌍룡 그림도 그러한 뜻이리라. 정조가 존덕정을 정비하면서 심었다는, 존덕정 곁에 은행나무가 정자를 위엄있게 호위하고 서 있다.

 

 산길을 따라 더 올라가면 후원 깊숙이 자리한 옥류천(玉流川) 일대에 도달한다. 옥류천은 후원 북쪽 깊은 골짜기를 흐르는 시내이다. 시내를 둘러싸고 취한정(翠寒亭),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이 서 있고, 한쪽 곁에는 어정(御井, 임금님의 우물)이 자리하고 있다. 소요정 앞에는 있는 바위 소요암을 다듬어 물길이 휘돌게 하고 이 물길을 내려 작은 폭포가 되게 하였다. 바위 위에는 인조의 친필 ‘玉流川’이 새겨 있고, 숙종의 한시도 쓰여 있다. 작은 정원 안에서, 웅대하면서도 엄격하며 또한 유연한 정신이 느껴진다.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그윽하고 신비로운 정원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예전에는 창덕궁 후원을 비원(祕苑)이라고 불렀다. 비원이라는 이름은 경술국치 전후에 일제의 강압에 의해 쓰게 되었다고 하여, 오늘날에는 후원이라는 이름을 쓴다. 후원의 아름다움은 이 자연을 그대로 살리며 꾸민 데 나온다. 그것이 우리 미(美)의 정서다. 허나 후원은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역사적 의미도 깊다. 이제 다시 둘러보니, 청년기의 내 눈에 비친 것처럼 황홀하지는 않았으나 누가 뭐래도 나의 경험 안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역사의 뜻을 더했으니 더 보탤 것이 있을까? 젊은 나이에 한 번쯤 그 아름다움에 취해 봄직하다.

 

*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각신(閣臣): 조선 때, 규장각의 벼슬아치.

*등용문(登龍門): 황허(黃河) 강 상류에 있는 급류, 용문(龍門)에 잉어가 올라가서 용이 된다는 전설에서 유래. 큰 인물이 되기 위해 거치는 어려운 관문이나 시험.

*의두합(倚斗閤): 지금 여기에는 기오헌(寄傲軒) 현판이 걸려 있으나, 예전의 창덕궁 모습을 동궐도에는 ‘의두합(倚斗閤)’으로 표기되어 있어 이 명칭이 일반적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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