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준 편집국장

 19세기 런던의 참혹한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의 이야기는 다들 알 것이다. 잭 더 리퍼는 당시 빈민가이자 윤락가였던 화이트채플에서 최소 5명의 사람을 살해하며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그가 벌인 범죄에 대해서는 일단 차치하고, 필자가 들여다보고자 하는 부분은 사건 이후의 변화이다. 그 끔찍한 범행이 오히려 빈민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당시 화이트채플 뿐만 아니라 19세기 영국은 전반적으로 산업혁명의 병폐로 찌들어있었다. 밤낮으로 일해도 끼니를 챙길 수 없을 정도의 혹독한 노동환경은 자연스레 빈민들을 양성해냈다. 여성 빈민들은 자연스레 매춘부가 되었고, 빈민가는 곧 윤락가로 변모한 것이다. 잠잘 곳 조차 없이 떠도는 매춘부들은 잭 더 리퍼에게 살해당했다. 이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이러한 병폐들은 영국 전국으로 퍼지며 빈민구제에 대한 여론을 이끌어냈다. 빈민 살해가 모순적이게도 빈민 구제와 복지 정책을 만들어낸 것이다. 과학 수사 기법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처럼 모순적이고 역설적이게도, 끔찍한 사건들이 오히려 상황을 개선시키는 경우는 굉장히 많다. 최근 논란이 된 군대 격리자 급식 사건은 큰 파장을 불러왔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는 안전 불감증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켰다. 삼풍백화점 참사 이후에는 부실 공사에 대한 대대적인 점검이 있기도 하였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고 나서야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냉혹하다. 누군가가 희생되고 나서야 부랴부랴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이런 아이러니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 몸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빨이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이미 충치는 신경까지 도달한 상태일 것이다. 물론 최선의 방안은 충치가 커지기 전에 미리 눈치채고 관리를 하는 것이고, 큰 사고가 터지기 전에 미리 해결을 하는 것이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해결이라도 깔끔히 하는 것이 그나마 나은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충치가 있다면 깔끔히 없애고 단단하게 매꿔야하지 않겠는가? 

 항공대신문을 통해 계속해서 다루어왔던 젠더 갈등도 계속해서 터져나오고 있다. 논란이 되는 ‘손모양 숨기기’는 이제 어느 것이 진실인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오고 있다. 여성을 혐오하는 글을 본 직후에는 남성을 혐오하는 글을 볼 수 있다. 정치 논란도 거세다. 커뮤니티 글에서 특정 정당을 비난하는 단어를 빼놓은 글은 찾기조차 힘들다.

 내가 두려운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과연 이러한 갈등 끝에 터져나오는 ‘잭 더 리퍼’ 사건은 무엇일지이다. 지금의 갈등도 심각한데 대체 어느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우리는 심각성을 깨닫고 자정작용을 할 수 있을까? 두 번째는 갈등이 터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갈등이 폭발하기를 바라는 것은 굉장히 끔찍한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오히려 갈등이 폭발하지 않고 쌓여만 가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삼풍백화점의 예시를 들어보면, 붕괴 후 전국적으로 건축물 안전점검을 시행한 결과 대한민국 전체 건물의 2%만이 안전한 상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만약 이런 점검이 없었던 상태에서 지진이라도 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실례로, 이 조사로 인해 당산철교는 철거 후 다시 지어졌다. 수 많은 시민들이 출퇴근하는 지하철 2호선이 지나다니는 당산철교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철거 과정에서 무너지기까지 하였다. 성수대교 붕괴 사건의 사망자가 32명이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의 사망자는 502명인데, 당산철교가 출퇴근 시간에 무너졌다면 최소 2000명의 사망자가 나왔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갈등이 감당 못할 만큼 커지기 전에 사회 밖으로 드러나야 ‘건강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정말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인리히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1:29:300의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이 법칙은 어떤 대형 사고가 터지기 전에는 반드시 29번의 작은 사고와 300번의 사소한 징후가 발생한다는 현상을 설명한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한 번의 큰 갈등이 터지기 전에, 지금 발생하고 있는 29번의 기회 안에 우리는 갈등을 잠재울 수 있을까? 우리에겐 몇 번의 기회가 남아있는 것일까?

 

 요즘 우리 사회에 갈등의 불씨가 퍼지는 것은 더 건강해지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그저 썩은 고름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것일까. 부디 전자이기를 바란다. 근육통을 겪어야 근육이 생기듯, 잠시 앓는 성장통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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