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코로나 1차 백신을 맞았다. 집에서 며칠 쉬기로 작정했다. 마냥 누워 있기 민망해서, 뭔가 할 일이 없을까 궁리하던 중 예전에 사 두었던 퍼즐이 생각났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생명의 나무」, 1000 조각 퍼즐이다. 500 조각 퍼즐을 몇 차례 맞추어 본 적이 있는 터라, 이번에는 한 이틀 쉬면서 이거나 맞추어 보자는 심산으로 서재 방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던 퍼즐을 찾아 마루에 펼쳐 놓았다. 어지러이 펼쳐진 퍼즐 조각들을 보노라니,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야말로 혼돈이 아닌가? 어떻게 질서를 부여할 것인가?

 우선 가장자리부터 하나하나 맞추어 갔다. 조각의 한쪽 선이 직선이니 비교적 맞추기 쉬웠다. 다음은 인물들을 맞추었다. 가장자리보다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맞출 만했다. 3분의 1도 맞추지 못한 것 같은데, 시간은 벌써 새벽 4시를 넘기고 있었다. 다 맞추는 데 그렇게 꼬박 3일이 걸렸다. 30여 시간 동안온 정신을 퍼즐 맞추기에 쏟았다. 움직이지도 않고 골똘히 퍼즐을 쪼아보는 나에게, 아내는 “백신을 맞고 피곤할 텐데, 왜 그 짓을 하슈?” 하고 핀잔을 준다. 글쎄, 왜 이 짓을 할까?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유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세계적인 등반가 조지 말로리는 1923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죠?”라는 질문에 “산이 거기 있기에…….”라고 대답한다. 흔히 이 말은 등산의 무목 적성 내지 순수성을 강조한 말로 쓰이며, 때때로 그와 유사한 인생사에 두루 비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말로리가 이 말 다음에 “에베레스트는 최고봉이고 아무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존재 그 자체가 도전이다. 세상을 정복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라고 덧붙인 것을 보면, 그런 의미와는 좀 거리가 있는 듯도 하다. 퍼즐을 하는 이유에 대해, “그것이 거기에 있기에…….”라고 대답하면, 지나친 유비(類比)일까?

 퍼즐 맞추기를 에베레스트 등반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1000 피스 퍼즐 맞추기도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모양이나 색깔, 무늬 등 조그만 단서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공통점과 차이점을 파악하며 끊임없이 조각들을 분류해 두어야 빈자리에 꼭 맞는 퍼즐을 찾을 수 있다. 그래도 어느 순간에는 다시 혼돈에 빠지고 앞길은 오리무중이 되기 일쑤다. 그런 난관에 부딪히면 포기하고 싶어지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으리 라는 믿음으로 버틴다. 그런 수많은 고비를 넘기고 1000 피스 퍼즐을 다 맞추었다. 그 순간 10000 피스 퍼즐을 꿈꾼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보람이 있다. 퍼즐을 맞추려면, 조각 하나하나 모양과 색깔과 무늬를 세심히 관찰해야 하고, 조각들 사이의 연관성도 정확히 포착해야 한다. 그러니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면, 그 과정에서 그 작품을 속속들이 알게 된다. 색감의 미묘한 차이와 흐름, 터치의 강약이나 속도, 인물과 사물의 배치, 전체의 구도 등을 예리한 지점까지 투시하게 된다. 그러니 퍼즐 맞추기가 예술작품을 깊이 감상하는 제법 괜찮은 방법이라고 해도 썩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퍼즐을 맞추는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래서 단순한 경치나 유명 건축물 퍼즐은 사양한다.

이중섭의 「흰 소」, 고호의 「밤의 카페 테라스」, 클림트의 「키스」 등의 퍼즐을 맞춘 적이 있다. 그때마다 느꼈던 것이, 그냥 보면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것도 상상도 못 했던 것들이, 아주 세밀한 디테일까지 보이게 된다는 점이다. 왜 그렇게 그렸는지 화가의 마음이 짐작되기도 한다. 「흰 소」를 보자면, 그것은 전체적으로 회색 톤으로 그려서 그냥 보기에는 색의 변화가 거의 없는 듯했다. 하지만 퍼즐을 맞추면서, 그 유사한 흐름 안에서 흐르는 듯 변하는 미묘한 색감의 변화를 감지하게 되었다. 이중섭은 그 흐름 위에 강렬한 흰색 톤의 터치로 대지를 밟고 힘차게 내딛는 소의 걸음걸이를 표현하고 있다.

 2009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클림트 전시회를 관람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클림트의 작품은 회화라기보다 시대를 뛰어넘는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황홀경에 빠진 듯한 인물의 눈과 기괴한 몸짓, 그로테스크한 의상, 그 위에 수놓은 그 화려한 색감의 다채로운 무늬들 그리고 울긋불긋 천변만화로 피어나는 문양들로 배치된 배경……. 거기에는 이집트, 무슬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보았던 문양들이 모두 녹아 있는 듯했다. 그런데 이번에 「생명의 나무」 퍼즐을 맞추면서 그러한 생각은 더 굳어졌다.

▲ 구스타프 클림프의 「생명의 나무」 퍼즐 완성작

 중앙에 나무가 동심원을 그리며 수많은 가지를 뻗어 낸다. 가지에는, 더러는 두 개의 눈이 새겨진 부채 모양의 열매가 열렸고, 더러는 세모의 열매들이 다양하게 변주되며 열렸다. 대지에는 다양한 꽃들이 흩뿌려져 있다. 오른편 남녀는 따뜻하게 포옹하고, 왼편 여자는 질투 어린 눈으로 그 남녀를 바라본다. 기괴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녀의 손은 공격적이다. 남녀의 옷 문양은 동심원인데, 여자의 옷 문양은 세모다. 나무 기둥에 원과 세모 무늬들이 다양하게 섞여 있다. 결국 동심원과 세모의 변주곡이다. 에로스와 질투(혹은 공격성), 그것들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 ‘생명의 나무’일까? 하지만 그러한 해석을 괄호에 묶더라도, 이 작품은 하나의 아름다운 디자인 작품이다.

 나는 등산을 무척 좋아한다. 산에 들어서는 순간 기분이 좋아진다. 힘겨운 여정을 마치고 내려오면 기분이 상쾌하다. 무엇보다 등산은 공정해서 좋다.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다고 특혜를 주는 것도 없다. 한발 한발 자기 발로 걸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퍼즐도 한 조각 한 조각 자기 손으로 맞추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다 맞추면 역시 상쾌하다. 예술작품을 맞춘다면 깊이 있는 감상이 수반되니 더욱 좋다. 2차 접종을 하고서는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가나카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를 맞추어 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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