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 생전 사진 (출처 :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8월 15일 광복절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서거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추모식은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김영관 애국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태극기로 관포된 홍 장군의 유해는 <올드 랭 사인>이 울려 퍼지며 공항에 마련된 제단에 안치되었다. 이 노래는 1896년 11월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합창한 것을 시작으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국가처럼 불리던 곡으로 알려져 있다. 추모식 뒤 홍 장군의 유해는 국립 대전 현충원으로 봉송됐으며, 8월 16∼17일 이틀간의 국민추모제를 거친 뒤 8월 18일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1년 8월 17일 홍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했다. 이미 1968년에 홍 장군은 항일무장투쟁의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훈한 바 있는데, 순국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것을 계기로 공적을 추가 인정해 건국 훈장 최고영예인 대한민국장 서훈을 잔행한 것이다.

홍범도 장군의 일생

 홍범도 장군은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다. 1868년 10월 12일 평안도 평양에서 태어나 1895년경부터 의병에 뛰어들어 함경북도 갑산, 무산 등지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10년 한일 병합 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거기에, 1919년에는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으로 임명,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이후 독립군의 통합 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다. 특히, 1920년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 격해 오자 3일간의 봉오동 전투에서 157명을 사살하며 최대의 전과를 올렸고, 이어서 청산리 대첩에서 김좌진의 북로군 정서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하지만 1937년 스탈린 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키질 로르다로 강제 이주 당했다. 키질로르다로 옮겨온 그는 거기서 집단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고, 말년에는 고려극장의 관리인으로 일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943년에 향년 7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이후 키질로르다의 한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드디어 2021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다시 안장되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 반환을 위한 노력들

 오랜 기간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한 홍 장군의 유해를 한국에 모신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추진해온 독립유공자 유해봉환 사업이 일군 큰 성과다. 사실 홍범도 장 군의 유해를 옮기려는 시도는 북한에서 먼저 이뤄졌다. 왜냐하면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국가의 정통성으로 삼는 북한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인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심으로써 국가의 정당성을 강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은 1993년경 홍 장군 유해를 북으로 봉환하겠다며 카자흐스탄 정부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고려인 사회가 남북한과의 관계를 고민하다 결국 봉환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한국 정부 조사단은 1994년 9월 홍 장군 묘소를 조사하고 카자흐스탄 정부 측과 유해봉환에 원 칙적으로 합의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북한은 1995년 8월 28일 평양방송을 통해 “홍 장군 유해봉환은 (남측의) 사기 협작극이며 홍범도 열사의 고향이 평양이고 후손들도 평양에 있기 때문에 평양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북측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가보훈처는 홍 장군 유해를 모시기 위한 활동을 계속했으며 2017년 7월에는 묘소 실태조사 때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관계자 등과 면담해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을 본격 논의하였다. 특히, 2019년 문 대통령은 중앙아시아 순방 최종 보고 때 홍 장군 유해 봉환을 추진하라고 지시하며 추진에 탄력이 붙었다. 이어진 양국간 협의 끝에 문 대통령은 제101주년 3·1절 기념사를 통해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을 최초 발표하였고, 결국 지난 16일 토카예프 대통령의 방한이 성사되며 홍범도 장군의 유해도 귀국길에 올랐다.

홍범도 장군 유해 추모식 이후의 계획

 홍범도 장군 이외에도 아직 돌아오지 못한 국가 유공자들이 많다. 특히 간도시 참변, 자유시 참변 등으로 타국에서 무참히 살해되신 이름 모를 유공자들뿐만 아니라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 여러 이방 지역에 강제 이주되어 살고 있는 고려인들 역시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힘들게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19일 조덕현 국가보훈처 대변인은 이번 유해봉환 이후 카자흐스탄 홍범도 장군 묘역이 있던 장소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상징적인 장소로 관리하고, 안중근 의사 유해를 비롯해 국외에 안장된 독립 유공자의 유해봉환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을 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를 통해 향후 정부가 홍범도 장군에 이어서 다른 유공자들의 유해 반환에도 최선을 다할 것임을 시사 했다. 하지만 유해반환 이외에도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타국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기에, 독립 운동가 후손들의 귀환과 지원을 위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홍범도 장군 유해 반환의 시사점

 국립대전현충원과 국가보훈처 온라인 국민추모공간에서 홍장군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애도 열기가 뜨겁다. 15일부터 마련된 추모 페이지에는 총 6만여의 접속과 6,400건의 감 사와 추모의 글이 올라왔고 유튜브 등 국가보훈처 사회관계망 서비스에 올린 홍범도 장군의 영상과 사진의 총 조회 건 수는 100만 회에 달했다. 특히, 국립대전현충원에 설치된 국립분향소에는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16일, 17일 이틀 동안 2,800여 명이 방문하는 등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이와 같이, 서거 78년 만에 고국으로 귀환한 이번 홍범도 장군 유해 반환 행사는 국민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것 으로 나타났다. 특히, 훌륭한 선조가 있는 한국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70년을 넘은 유해를 반환해 올 정도의 달라진 한국의 위상에 모두가 감격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최근 현대인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은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인 것으로 보여진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수능 한국사 필수 과목 지정, 한국사 능력검정 가산점 인정 등의 유인책으로 역사를 가르쳐보았으나 스펙을 위한 공부가 될 뿐, 오히려 역사를 기피하게 되는 등의 역효과가 발생 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번 사례처럼 직접 행동으로 정부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국민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은 자발적으로 달라질 수 있기에, 관련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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