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수영 탄생 100년을 기리며

 지난 11월 27일은 시인 김수영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김수영은, 때로는 산문투로, 때로는 구어체로, 한자 투성이 관념어에 욕을 섞어가며, 자유를 가로막는 모든 세력에 대고 거칠게 시를 내뱉었다. 마치 자신의 시론, ‘詩여, 침을 뱉어라’를 온몸으로 실현하듯이…….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한 속깊은 사랑을 노래했다. 그는 이렇게 세상과 맞서며 자유와 사랑을 노래하다가 1968년 48세의 이른 나이에 저 언덕을 넘어갔다.

 김수영은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한다. 1949년에는 김경린, 박인환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표하기도 한다. 합창이라고 하니 화창한 분위기를 연상하기 쉽지만, 정작 그들이 시에 담아내고자 했던 것은 겉보기에 화려한 현대 문명의 어두운 이면이었다. 그들은 구시대와의 단절과 현대 문명의 비판을 내세우며 이른바 모더니즘을 표방했던 것이다. 이 시기 김수영은 「공자의 생활난」, 「아메리카 타임誌」 등의 난해시들을 발표했다.

 한국전쟁 당시, 김수영은 인민군 의용군에 징집되어 이북으로 넘어갔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서울까지 오지만, 전쟁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다.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좌우의 또 다른 전쟁터였다. 좌우 세력의 갈등은 피를 보기 십상이고, 아침이면 화장실에서 시체가 떠오르기 일쑤였다. 아마도 김수영은 이때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이념을 초월한 자유와 사랑의 시정신은 그냥 사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몸으로 겪은 역사적 현실로부터 구축된 것이다.

 김수영의 시는 1960년 4.19혁명과 더불어 불꽃처럼 피어난다. 이승만 독재에 참다못한 시민들의 분노는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폭발한다. 4월 19일 경무대 앞 총격으로 서울에서만 백여 명이 사망한다. 대부분이 학생들이었다. 27일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난다. 하루 전 26일 아침, 김수영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고 썼다.

▲ 시인 김수영(1921-1968)

 대개 김수영을 거론하면 ‘참여시인’을 떠올린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일 터인데, 크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를 단편적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김수영은 1968년 4월 부산에서 개최된 문학세미나에서 「詩여, 침을 뱉어라」라는 시론을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고 설파한다. 또한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고 말했다.

 김수영이 생각하는 참여란, 권력이든 이념이든 풍문이든 자유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한 거부와 저항이다. 그것은 오직 진실을 향해 온몸을 던져 밀고 나갈 때 마주치는 경이, 그가 말하는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다. 그것은 모험이다. 그는 온몸을 던져 세상을 비판했지만, 그가 비판한 세상에서 자신을 제외시키지는 않았다.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그것은 자기비판의 시이고, 자기학대의 시이고, 자기성찰의 시이다. 그는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하고 쓴다. 자기를 향한 냉철한 화살은, 시인의 몸을 뚫고 독자의 마음을 뚫고 사회와 역사를 관통했다.

 1968년 6월 16일, 김수영은 소설가 이병주와 ‘한국일보’ 기자 정달영과 술을 마셨다. 이병주가 자신의 볼보 승용차로 데려다 주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이병주에게 ‘딜레탕트’라 욕설을 퍼붓고, 홀로 귀가했다. 자정 무렵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적십자 병원에 후송되지만 영영 눈을 감고 만다. 양복 주머니엔 소설가 뮤리엘 스파크의 ‘메멘토 모리’ 번역료가 들어 있었다.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아닌가?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봄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라고 노래하며 세상사에 조급히 굴지 말기를 권하던, 그가 왜 그렇게 서둘러 갔는가?

 시인 황동규가 적절히 지적한 것과 같이, 김수영 시는 시인의 타계 후 지속적으로 진화했다. 거칠고 투박하다 하여, 그의 시를 폄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투박하고 거친 시속에서 꿈틀거리는 자유와 사랑에 대한 끝없는 갈망은 동시대 독자들을 감염시켰다. 그 감염력은 날이 갈수록 확산되어, 이제 그의 시는 역사가 되고 신화가 되고 있다. 하지만 김수영은 이 또한 거부하지 않을까?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김수영의 시를 읽으면 늘 놋주발보다 더 쨍쨍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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