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은 시간 가로등, 전등, 하다못해 불빛이 켜져 있는 곳 어디든 항상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목숨이 걸린 장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빛이 그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날아드는 불나방들이다. 전깃불의 고통이 더는 날개를 펼 수 없을 만큼 아플지라도 혹은 죽음에 이를지라도 다시 빛을 향해 날아든다. 특히나 유아등 주위에는 곤충들의 사체가 가득할 정도이다.
나는 불나방들이 정말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매미도 잠깐의 시간을 위해 수년간을 땅 밑에서 지낸다지만, 고작 불빛 하나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불나방과는 차마 비교가 될까 싶었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매미는 무언가를 이루고 가지만, 불나방에게는 죽음 말고 무엇이 있단 말인가? 혹여 다음 생이 있다 할지라도, 눈앞에 있는 불구덩이, 죽음에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행동은 차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였다. 안락사에 관한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한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얼마 안 가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채워가던 사람이었다. 그의 버킷리스트는 작은 텃밭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세계 일주를 하는 것까지 아마 그가 죽기 전에 이루고 싶었던 것들 모두를 적은 종이일 것이다. 실현 가능성이나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가 한 인간으로 태어나 단지 하고 싶었던 것들을 낡은 종이에 손이 가는 대로 쓴 지저분한 필기, 그 종이 자체만으로도 자신에 대한 도리를 다한 것이리라.
  요즘 유언장을 미리 적어보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언젠가 생을 마감하게 될 때를 상상하며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보도록 하는 것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 유언장을 미리 적어보는 것의 효과가 얼마나 지속될지를 생각해보면 의외로 굉장히 짧을지도 모른다. 몇몇 사람들도 자신이 유언장을 항상 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다만 그러한 사실에도 유언장을 미리 적어보는 것은, 아마 버킷리스트와 같이 삶의 의미를 돌아보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 어리석은 불나방에게는 종이쪼가리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빛을 쫓는 맹목적인 본능 하나에 몸을 맡기고 자신에게 주어진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그 모습은, 행동하기에 앞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누군가와는 다를 것이다. 유아등에도 달려드는 불나방의 모습을 보며 자신을 잡으려는 함정인 줄도 모르고 타죽는 어리석은 곤충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빛의 중심에서 눈부시게 빛날 자신의 모습으로 불빛 속에서 타죽을 자신의 모습을 가린 것이란 걸 왜 몰랐을까.
  더 이상 불나방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빛을 쫓는 것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생리적 본능일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도리를 다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불빛에 달려들기 때문에, 그 행동 때문에 그러니까 죽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달려드는 것이다.
  언젠가 자신의 행동에 확신이 서지 않을 때, 더 이상 지쳐서 나아갈 수 없을 때, 한번 떠올려보자. 죽음으로 향하는 그 빛나는 모습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불나방과 눈부시게 빛나는 자기 자신이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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