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누군가에게는 명예를 얻는 것으로부터 올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것으로부터 올 수도 있다. 반대로 봉사를 하거나 베푸는 것을 통해 행복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행복’이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시점에서 온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스무 살만 되면 매우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공부와 게임, 축구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년 동안 살아오면서 해본 것이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스무 살이 되면 나이 때문에 할 수 없었던 다양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내가 지원했던 대학이 합격 통지를 하는 전날까지 하루하루가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했던 모든 것들은 불안감 속에서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대학에도 합격을 못하고 재수를 하게 되어 나의 행복은 저 멀리로 떠나간 듯했다.

  이후 대학을 합격하고 우리 학교 신문사의 편집장을 맡은 이후로는 성공적으로 신문을 발간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이 되었다. 한 학기에 여섯 번이라는 확실히 정해진 횟수. 그리고 그 행복감을 더해줄 좋은 반응. 좋은 반응을 받기 위해 흘린 나의 땀방울이 평가되는 그 순간이 스물한 살 이후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 중 하나가 되었다. 성공적인 발간을 하고서는 다음 신문을 발간하기 위해 회의를 하고 마감을 하고 취재를 하는 등 모든 활동이 즐거웠다. 하지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을 때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구독자들이 만족하는 신문을 발간하기 위해 했던 나의 노력이 최선을다한 것은 아님을 방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태껏 내가 내린 행복은 미래에 초점이 맞춰진 중·고등학교 시절의 바람이었던 ‘스무 살’, 대학생 때는 학기 중에 바랐던 ‘신문의 발간 일’이었다. 이것들은 당장은 조금 힘들더라도 지금 나의 시간을 투자해야 얻을 수 있는 불확실한 미래였다. 현재의 행복은 잠깐 제쳐두고 오직 다가올 순간만을 위해 투자를 한 것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었다. 100% 보장된 미래를 위한 투자와 그 투자가 결실을 맺는 순간은 행복이라 할 수 있지만, 불확실한 미래는 나에게 불확실한 행복을 가져다줄 뿐이었다.

  행복에 대해 톨스토이는 “조용한 시골, 친절을 기대하지 않는 주민들에게 선을 베풀며 산다. 그리고 의미가 조금이라도 부여된 소일을 한다. 나머지는 휴식, 자연, 책과 음악,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사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다”라고 말했다. 어차피 미래라는 것은 현재로 다가오는데 불확실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 행복한 순간들을 희생시킬 필요가 있을까? 물론 지금 당장 느끼는 행복감만 탐닉하여 나의 미래를 망치는 어리석은 판단을 해서는 안 되지만, 굳이 현재 느끼는 행복감을 억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오롯이 수능의 해방감을 만끽하며 친구들과 놀았다면, 편집과정 그 자체만을 즐겼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 아닌 후회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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