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이야기-2

  “향기로운 MJB의 미각을 잊어버린 지도 이십여 일이나 됩니다. 이곳에는 신문도 잘 아니오고 체신부는 이따금 ‘하도롱’* 빛 소식을 가져옵니다.” 이상(李箱)은 1935년 「산촌여정(山村餘情)」의 서두를 이렇게 썼다. 「산촌여정」은, 폐병을 앓던 이상이 요양을 위해 친구의 고향인 평안북도 성천에 갔던 경험을 쓴 수필이다. 신문, 하도롱과 더불어 MJB(커피)는 도시를 상징하는 어휘들이다. 신문이 오지 않을 정도로 궁벽한 성천에서 하도롱 빛의 도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이상의 모습이 선연하다. “향기로운 MJB의 미각”을 잊어버렸을 정도로, 그는 도시 생활로 부터 멀어져 시골 생활에 젖어 있다. 다방 ‘제비’를 운영했던 모던 보이 이상에게서는 짙은 커피 향기가 풍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커피를 즐긴 사람은 고종 황제라고 한다.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은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커피를 맛보았다. 고종은 러시아 웨벨 공사의 처형인 독일계 러시아인 손탁(Antoinette Sontag)의 권유로 커피를 접하게 되었고, 당시 세자였던 순종과 함께 커피에 맛을 들였다.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궁한 뒤에도 커피 맛을 잊지 못하고 커피를 계속 찾게 되었다. 고종은 덕수궁에 정관헌이라는 서양식 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서양음식을 즐겨 들었고, 외국 공사들과 연회를 갖기도 하였다. 커피에 얽힌 고종의 일화가 어느 정도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관헌은 우리나라 최초의 카페인 셈이다.

  실제 우리나라 최초의 카페는 손탁호텔에 들어섰다. 1902년(혹은 1896-1896년 사이라고도 함) 고종은 외국인을 접대하기 위하여 서양식 건물인 손탁호텔을 지어 손탁에게 무상으로 하사하였다. 손탁호텔에서 서울의 첫 번째 호텔식 다방이 문을 열었다. 이후 궁중에서는 관리들에게 선물을 내릴 때에 선물 목록에 커피도 포함시켰다. 커피는 단지 왕실의 기호품으로만 그치지 않고, 중앙의 관료, 서울의 양반, 지방의 양반으로 점차 확대되면서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서양의 개화바람을 흡입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커피는 서양문물의 상징이었고 손탁호텔은 커피를 유입하고 공급하여 전파하는 창구 역할을 담당하였다.

덕수궁 정관헌

  1920년대와 1930년대를 풍미하던 모더니즘의 바람을 타고 커피는 급격히 확산된다. 커피 한 잔에 10전의 고가였기에 돈 내고 사탕물을 마시는 세상이 왔다고 탄식하는 이도 있었지만, 당시 유행의 첨단을 걷던 ‘모던 보이’, ‘모던 걸’에게 커피는 사탕물 이상이었다. 이들은 주로 무위도식하는 상류층 자녀들이었다. ‘모던 보이’는 비싼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다녔으며, ‘모던 걸’은 단발머리를 하고 작은 양산을 들고 다녔다. 이들은 영어나 일본어를 대화에 곧잘 섞어 쓰면서 시대의 소비와 유행을 이끌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이들은 전통세대와의 거리를 확인하고 스스로 서구적 근대인이 되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영화 「암살」에 나오는 전지현과 하정우의 미라보 카페 장면은 이러한 정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모더니즘 예술도 무르익어 갔다. 이상(李箱)은 이 시대의 문화 영웅이다.

  커피 향이 비극적으로 풍기는 소설이 있다. 김동리의 「밀다원시대(蜜茶苑時代)」가 그것이다.이 소설은 1951년 1·4 후퇴 당시 부산에 피난 간 문인들의 절망을 담고 있다. 그들은 밀다원이라는 다방에 모여 앉아 커피를 마시며 불안감을 나눈다. 그들이 나누는 불안감이란 부산이라는 ‘땅 끝’, ‘끝의 끝’, ‘막다른 끝’에 섰다는 절망감에서 온다. 그것는 전쟁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러한 환경에서 자각되는 실존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쟁의 절망과 불안 속에서도 커피는 그들에게 일말의 여유를 준다. 주인공 이중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구는 여러 친구들의 ‘식기 전에’라는 권고에 의하여 아직도 김이 모롱모롱 오르는 노리끼한 커피를 들어 입술에 대었다. 닷새 만이다. 한 십년 동안 시베리아 같은 데 유형(流刑)살이를 하다 돌아와서 처음으로 커피를 입에 대어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도 커피의 한 모금은 그의 가슴 속에 쌓이고 맺혀 있던 모든 아픔을 한꺼번에 훅 쓸어주는 듯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이 모두 실존인물에 가깝다는 점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설가 김동리, 평론가 조연현, 소설가 오영수, 시인 전봉래 등과 거의 일치한다.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커피는 ‘실제로’ 전쟁의 불안과 절망도 잠시 잊게 하는 마법의 음료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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