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집 서가 한 켠에『 빙점』이라는 소설이 꽂혀 있었다. 1976년에 신문출판사에서 발행한 상하합본 완역판이다. 앞표지에는 제법 멋을 부린 일본여성이 벤치에 앉아 웃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고, 뒤표지에는 구도를 고려한 것 같지 않은 설산(雪山) 사진이 실려 있다. 어디를 보나 품위 있는 책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이 품위 없는 책이, 당시 책께나 읽는 집 서가에는 한 권씩 꽂혀 있었다. 그만큼 이 책은 당시에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서점가를 풍미한 소설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수십 년 동안 여러 차례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 상영되었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대중적인 책이라는 인상 탓인지, 내 손은 그리로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읽어야할 책으로 여겼다.


  미우라 아야코는, 1963년 장편소설『 빙점』으로 아사히신문 1천만 엔 현상모집에 당선됨으로써, ‘빙점 신드롬’을 일으키며 불혹(不惑)의 나이에 일본 문단의 스타가 된다. 그녀는 폐결핵 투병 중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소설을 쓰게 되는데, 잡화상을 운영하며 틈틈이 시간을 내서 쓴 소설이『 빙점』이다. 선천적으로 병약한 그녀는, 끊임없는 병치레에도 불구하고, 남편 미우라 미쓰요의 헌신적인 외조 덕분에 죽을 때까지 창작생활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만년에 파킨슨병으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남편의 도움 없이는 화장실을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혼자 누울 수 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언제나 숲처럼 조용했다고 한다. 남편은 그녀의 작품 대다수를 구술 필기하였다. 남편은 300페이지 분량의 책 70여권의 작품, 즉 원고지 2만장을 구술 필기했다.

▲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 자필원고


  “원수를 사랑하라”, 하지만 인간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자기 자식을 죽인 살인범의 자식을 입양하여 키우며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능한 것일까? 『 빙점』은 미우라 아야코의 사상을 관통하는 기독교적 사랑에 대한 문학적 질문이다. 아사히카와의 종합병원 원장 쓰지구치 게이조는 딸 루리코를 죽인 범인의 딸 요코를 입양한다. 이는 아내 나쓰에의 외도를 의심한 복수 행위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그를 그 길로 이끌었다. 상황은 순탄치 않다. 게이조 자신이 요코를 사랑하려고 노력하지만 늘 갈등 속에서 헤맨다. 요코에 대한 나쓰에의 지극한 사랑은, 요코의 정체를 알고서 살인을 시도할 정도의 적의(敵意)로 변한다. 이에 요코는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요코가 실제 살인범의 딸이 아니라는 의외의 결말은 소설의 주제를 회개와 화해로 전회시킨다.

▲ 요코 역을 맡은 영화와 드라마의 두 배우(1966)

 
  아사히카와는 『빙점』의 무대가 된 곳이다. 여기서 미우라 아야코는 태어나서『 빙점』을 쓰고 평생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 도시 외곽 한적한 숲에 미우라 아야코 문학관이 있다. 미우라 아야코 문학관은, 그녀의 사망 후에 남편과 운영하던 잡화상을 개조하여 만들었다. 순전히 팬들이 모금을 해서 건립 유지하고 있다니 더욱 뜻 깊은 문학관이라 할 만하다. 문학관에 들어서니 작은 중앙 홀에서 미우라의 소설 낭독 행사가 한창이다. 십여 명의 미우라 문학애호가가 모여 그녀의 소설을 낭독하는 모습에 머리가 숙여졌다. 그들의 진지한 표정에는 미우라와 그녀의 작품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그윽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관(官) 주도의 허울 좋은 문학 행사와 비교하면, 그것이 소박하기에 더욱 문학적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2층 전시실에는 미우라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빙점’의 여주인공 요코를 나란히 찍은 사진이 흥미로웠다. 이 소설이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될 때마다 누가 요코 역할을 맡을지가 큰 관심사로 떠오른다. 그만큼 요코는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배역이다. 문학관 뒤에는 ‘외국수종견문림’이 펼쳐져 있다. 100여 년 전부터 심어 가꾼 외국 수종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며 문학관을 감싸고 있다. 미우라가『 빙점』을 쓰면서 거의 매일 산책하며 작품을 구상한 곳이다. 숲이 다하는 곳에는 비에이 강이 흐른다. 그곳은 게이조의 딸이 죽은 곳이기도 하며, 요코가 자살을 시도한 곳이기도 하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의 숲을 거닐자니 높은 나뭇가지에 쌓여 있던 눈덩이들이 떨어져 내린다. 안타깝게도 눈이 너무 깊어 비에이 강까지는 갈 수 없었다. 멀리서 그곳 풍경을 짐작할 뿐이었다.


  『빙점』이 너무 큰 대중적 인기를 누린 탓인지, 미우라 아야코는 그 인기에 비하면 문학성을 덜 인정받는 편이다. 『빙점』의 인기에는, 분명 그 대중적 요소가 한몫했다. 나쓰에와 무라이의 부적절한 애정, 그에 대한 게이조의 오해와 질투와 복수, 요코의 희생 등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인물에 대한 섬세한 심리묘사에 힘입어 기독교적 사랑에 대한 질문을 깊은 데까지 끌고 간다. 『빙점』이시간을 넘어 인기를 누리면서 고전적 가치를 확보하는 힘이 여기 있다. 잡화상을 운영할 무렵, 장사가 너무 잘돼서, 주변의 다른 잡화상들이 그만큼 힘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미우라는 물건의 종류를 줄이고, 고객들을 다른 잡화상에 보내며, 가게 운영 시간을 단축했다고 한다. 미우라 아야코는 『빙점』에 담겨 있는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였고, 그래서 지금도 일본인들은 그녀와 그녀의 작품을 사랑한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녀 곁에서 그녀를 돌보면서 그녀의 작품을 구술 필기한 남편 미우라 미쓰요도 역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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