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기(西遊記)』

  실크로드는 시안에서 시작해서 로마에 이르는 장대한 중세 무역로이다. 시안을 출발하여 란저우를 거쳐 둔황에 이르면 한족문화와 회족문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혼합문화를 경험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 신장(新疆) 지역 깊숙이 자리 잡은 투루판에 이르면 이제 회족문화가 한족문화를 압도한다. 문화가 달라지는 만큼 기후와 풍광도 따라서 달라진다.
  투루판은, 해수면보다 280m 낮아 사해(死海) 다음으로 해발고도가 낮은 지역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분지여서 투루판은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투루판의 더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화염산(火焰山)이다. 산은, 하늘을 향해 불길이 활활 솟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 『서유기』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손오공과 우마왕의 결투가 벌어지는 곳이 바로 이 화염산이다. 내가 화염산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오전 10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화염산 앞에 설치된 대형 온도계의 수은주는 벌써 섭씨 4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낮에는 50도를 훌쩍 넘는다.

▲ 투루판의 화염산


  실제의 당나라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이곳 투루판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이곳의 그 무지막지한 더위가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지는 않았을까? 화염산의 형상을 목도(目睹)하는 순간 정말 산이 불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는 않았을까? 우마왕의 아내 나찰녀의 파초선(芭蕉扇) 없이는 저 불꽃을 도저히 잠재울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실제로 삼장의 눈에 투루판의 기후와 화염산의 형상은 요괴의 장난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기괴한 모양의 화염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삼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보다는 『서유기』의 문학적 상상력이 우리 마음에 더 깊이 파고든다.

▲ 화염산의 거대한 온도계. 오전 10시밖에 안 되었는데 수은주는 섭씨 40도를 가리키고 있다.


  현장법사(玄奘法師), 삼장은 불경에 두루 능통하다하여 당태종이 내린 법명이다. 열세 살에 출가하여 불경 연구에 몰두하지만, 불경 원전의 부족에 갈증을 느끼고 스스로 천축(天竺,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오기로 마음먹는다. 삼장은 629년에 시안을 출발하여, 630년에 사막의 모래바람과 설산의 추위를 헤치고 천축에 도착하고, 645년에 6백여권의 불경을 가지고 시안으로 돌아온다. 이후 삼장은 불경번역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이는 극동아시아의 불교 융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기념비적 사건이다. 삼장은 『대당서역기』에 그의 행적을 고스란히 담는다. 삼장의 행적은 끊임없이 이야기로 만들어지다가 명대에 이르러 오승은에 의해 『서유기』로 완결된다.
  『서유기』에는 흥미진진한 사건들로 가득하다. 손오공이 신선을 만나 72가지 술법을 익히고 근두운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천상세계를 혼란에 빠트리는 이야기, 석가여래와 대결을 벌이지만 그래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것, 삼장이 손오공을 비롯한 저팔계와 사오정을 만나는
내력, 그리고 천축에 도달할 때까지 수많은 요괴를 물리치며 요괴들을 불도(佛道)로 인도하는 사건들……. 삼장법사 출생의 내력은 그 자체로 그 어떤 소설보다도 흥미롭고 문학적 깊이를 지닌 한편의 완성작으로 읽히기도 한다.
  『서유기』는 「날아라 슈퍼보드」를 비롯하여 「드래곤볼」, 「최유기」 등 각종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재창작되어 왔지만 물론 동화는 아니다. 환상소설을 거론하면 그 어떤 작품도 이 소설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지만, 『서유기』가 단지 환상소설의 범주에만 머무는 작품도 아니다.
여기에는 중국을 넘어선 아시아 전역의 신화와 전설과 풍속과 지리가 스며있으며, 불교 이론이 때로는 조밀하게 때로는 느슨하게 소개된다. 또한 다양한 인간 욕망의 충돌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삶에 대한 성찰 그리고 삶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불교적 깨달음이 담겨 있다. 그래서 『서유기』는 『삼국지』, 『수호지』, 『금병매』와 더불어 중국 4대 기서(奇書)의 하나로 우뚝 서 있다.
  수렴동에서 미후왕(美猴王)을 칭하며 호의호식하던 돌원숭이(손오공)가 신선술을 익히러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슬픈 눈물을 흘린다. 수렴동의 부귀영화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며 자신은 결국 죽고 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석가의 출가 내력과 다를 바 없다. 불경을 구하러 가는 삼장도 그러하거니와 저팔계 사오정에게도 사정은 비슷하다. 삼장 일행 뿐 아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요괴들도, 허욕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면서도 끊임없이 극락정토를 바라는 중생들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결국 손오공 일행은 81가지의 난(難)을 해결하고 해탈에 이른다. 『서유기』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일행의 구도행을 그리는 대서사이다.
  고온 건조한 투루판의 날씨는 그곳 사람들에게 당도 높은 청포도를 선물했다. 투루판은 청포도 세상이다. 시장이든 가게든 관광지든 어디서나 값싼 청포도를 사먹을 수 있다. 거리도 온통 청포도 넝쿨로 장식되어 있다. 그 넝쿨에는 청포도가 주저리주저리 열린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날씨가 더워지면 때때로 달디 단 투루판의 청포도가 그리워진다. 투루판의 시원한 포도 넝쿨을 생각하며, 청포도 알을 터트리면서 『서유기』를 읽는 재미에 푹 빠진다면, 그것이 또한 삼매(三昧)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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