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휘권 편집국장

  남자라면 어렸을 때 친척들에게 ‘장군감이다.’라든지 ‘대장부답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꽤나 있었을 것이다. 대장부라는 단어는 ‘건장하고 씩씩한 사내’라는 뜻에 걸맞게 강인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뭔가 상당히 점잖고 어른스러우며 묵직한 느낌이 든다. 여자에게 쓰는 ‘여장부’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이다. 여자지만 남성스러운, 남자 중에서도 점잖은 남자에게서나 보일 법한 느낌의 소유자라는 인식을 주는 단어다. 그렇다면 ‘대장부’라든가 ‘여장부’의 조건은 무엇일까.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면 뭔가 사극에서나 나올법한 장군의 이미지가 그려지기도 한다. 말수가 적고, 감정에 쉽게 휘둘리지 않으며, 어디서나 근엄함을 잃지 않을 것만 같다. 촐싹대지 않으며 흔히 말하는 ‘어른스럽다’라는 표현의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과감하고 지혜로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대장부라고 부르는 사람은 과연 정말 대장부 같아서 대장부로 불리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대장부라고 부르기 때문에 대장부 같은 사람이 된 것일까? 두 경우 모두 가능하겠지만 이 글에서는 후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미국의 사회학자 찰스 쿨리(Charles H. Cooley)는 ‘거울에 비친 자아’라는 이론을 펼친다. 사람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 자아를 설정한다는 이론으로 타인이 보고 판단한 자신의 모습을 토
대로 자아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생각해본다면 대장부 같다고 불리는 사람은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 대장부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장부가 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본성은 대장부와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원래 소심하고,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이었어도 사회화 과정에서 원래의 자아를 억지로 변형시켰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과정에서 즉각적이진 않지만 조그마한 상처가 쌓여나가기 시작한다. 자신을 스스로, 그리고 억지로 바꿔야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그 변형된 자아를 본모습으로 판단하고 대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받는 상처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마치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하는 논쟁처럼,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을 바꿨지만 오히려 사람들이 바뀐 모습을 보고 자신을 판단하고, 결국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바뀐 자아를 고착화시키는 챗바퀴 같은 일이 벌어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원래 성격이 정말로 달라질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이다. 자아를 규정했더라도 그것이 본성이 아닌 이상 어느 한 구석에 본성은 눌려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어느 곳에도 남지 않게 없애버리고 본성을 완전히 대체하더라도 자신을 억누르는 과정에서 마음속에는 자해의 상처만이 남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억지로 규정되어버린 대장부를 진정한 대장부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대장부인 ‘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가짜다, 흉내낸다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저 자신의 본성을 뜯어 고쳐버린 안쓰러운 모습이다.
  대장부의 한자인 大丈夫는 일본에서 참 흥미로운 의미를 가진다. 일본어를 잘 못해도 누구나 아는 표현인 ‘다이죠부데스까? (だいじょうぶですか?, 괜찮습니까?)’의 다이죠부(だいじょう
ぶ)를 한자로 쓰면 大丈夫가 된다. 그냥 한자만 읽으면 ‘대장부입니까?’로 직역되기에 그 뜻은 완전히 달라지는 것 같지만, 왠지 ‘괜찮습니까?’와 ‘대장부입니까?’의 느낌이 비슷하다. 통상적
인 대장부의 뜻을 생각해보자. 대장부는 항상 ‘괜찮지’않았는가. 어떤 어려움이 와도 굴하지 않고, 항상 씩씩했다. 나는 일본어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이런 이유에서 일본에서는 ‘대장부입니까?’ 라는 질문이 ‘괜찮습니까?’ 라는 의미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본에서 이런 의미를 가진 이유로 또 다른 하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단순히 외형적인 모습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대장부인 척 하느라 망가진 당신의 마음은 괜찮습니까?’라는 방향으로 말이다. 어쩌면 이 이유가 더 타당할 수 도 있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대장부로 포장했어야만 하는, 그
러기 위해 스스로를 억지로 변형시켜야만 하는, 그 과정에서 상처가 난 마음이 괜찮은가 하는 질문일 수도 있다. 사회적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대장부인 척 해야 할 수 밖에 없
어서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을 대장부라고 속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어디 한둘이던가. 심지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이런 부류의 사람일 수 있다.
  우리는 자주 주변에 씩씩한 대장부 같아 보이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고 대한다. ‘성격 좋으니까 이 정도는 받아줄 수 있겠지’라든가 ‘쟤는 괜찮겠지’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낸 사람에게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 마냥 조언하고 참견한다든가, 겉모습만 보고 모든 것을 다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는 것은 어쩌면 그 상처를 더 깊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는 현실적이지 않더라도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한번 물어본다. “당신은 대장부입니까? 大丈夫です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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