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휘권 편집국장

 

  얼마 전 10년 넘게 친하게 지내온 친구와 술잔을 기울였다. 간만에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가 한마디를 날렸다. “너도 밑바닥을 한번 찍어봐야 된다니까.” 군대를 전역하고 나름 막 살았다면 막 산 친구의 조언이었다. “야, 내가 미쳤냐? 여기서 더 밑바닥 찍으면 인생 어떻게 사냐? 난 벌써 지하까지 찍었다.” 친구랍시고 조언한다는 게 말 같지도 않아서 한 소리 했다. 그랬더니 친구가 “그럼 그 지하에서 바닥을 찍어봐”라고 헛소리를 지껄였다. “미친놈.” 워낙 둘이 만나기만 하면 헛소리나 해대며 술 마시는 게 낙이라 딱히 신경 쓰지도 않았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물에 빠졌을 때 바로 문을 열어보려고 해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바닥까지 가라앉아 자동차의 안과 밖의 압력이 비슷해져 그때야 비로소 문을 열 수 있게 된다. 즉, 한번 빠졌다면 바닥을 찍기 전까지는 올라올 수 없다. 또한 바닥을 찍었다면 단순히 위로 ‘올라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위로 ‘올라올 일만’ 남은 것이다. 그래서 이 사례는 특히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이 듣기도 하고, 마음을 다잡는데 많이 쓰이기도 한다. 지금 슬럼프가 와서 마치 자신이 밑바닥까지 떨어진 것 같다고 느낄 때,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며 스스로를 다잡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되는 의견을 내는 사람도 있다. 최근 인터넷 강의에서 최고 유명세를 타는 강사 중 한명은 “바닥 밑에는 지하가 있다.”며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라.”고 학생들에게 조언한다. 많은 학생들이 ‘이제 바닥이니까 올라가겠지’라며 방심하다가 오히려 더 떨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한 조언일 것이다. 어느 쪽이 진정으로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둘 다 일리 있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삶이 자동차 문을 열고 나와 올라갈 수 있는 밑바닥일 수도 있고, 아직 더 떨어질 수 있는 지하가 남은 바닥일 수도 있다.
  과연 진정한 밑바닥이란 어느 정도일까. 아무리 취업이 안 되고 돈이 없어도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세상에 정말 없을까.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학비도 스스로 벌어 내야 돼서 휴학을 밥
먹듯 해야 간신히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사람이 태반이다. 서울역에 가면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먹지 않는 이상 하루에 컵라면 하나도 제대로 먹기 힘든 사람들이 널렸다. 동남아시아에만 가
도 집에 돈이 없어 열 살도 안 된 아이들이 매일 공장에서 노동을 하고 있으며 기계를 잘못 만져 장애인이 되기도 한다. 아프리카에 가면 이틀에 한 끼 먹는 것도 힘든 사람들이 부지기수
다. 매일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기도 하고, 내전 때문에 가족이 총 맞아 죽거나 유린당하기도 한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과연 우리가 현실에서 힘들다고 밑바닥을 자처할
수 있을까. 심지어 지금의 현실을 헬조선이라고 욕하는 사람들 중에 저런 사람들보다 못 사는 사람들이 있기나 할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현실의 힘듦을 외면해야 하는 것인가. 개인이 아무리 힘들어도 단지 ‘세상에는 나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널렸다.’라는 논리 하나로 지금의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과연 힘든 삶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내가 그렇게 살 이유도 없을뿐더러, 지금 내 앞에 닥친 상황부터 힘든데 힘들게 사는 다른 사람의 사정까지 생각하라니. 내가 그 사정을 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내 삶이 바뀌지도 않고 그저 의미 없는 자위질에 불과할 것이다.
  학창시절 시험을 보면 하나 틀렸다고 시험을 망쳤다느니 이제 망했다느니 별 소리를 다 하는 재수 없는 놈들이 꼭 한명씩은 주변에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욕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그저 평소에 기대치가 높았고, 자신이 목표하는 바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쉬워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똑같다.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이 시련이 나에게는 힘든 것뿐이다. 남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괜찮고 말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마치 한 문제 틀렸다고 인생의 끝을 본 것 마냥 좌절하는 그 재수 없는 놈을 이해해보자. 지금 우리가 괴롭고 힘들어하는 이 삶도 누가 보면 그 놈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까 힘들어도 참자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냥 우리 모두는 나름의 힘듦을 각자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누가 힘들어 한다고 그것도 못 참느냐며 뭐라고 할 필요도 없고, 자신의 시련을 남들과 비교하여 ‘나는 괜찮다.’고 위안할 필요도 없다.
  끝을 알 수 없는 심해에서도 살아가는 생물이 있다. 그것들은 자신들보다 위에 사는 생물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들보다 밑에 사는 생물들을 하찮게 보지도 않는다. 그저 살아가는 것뿐이다. 바다의 바닥에 살고 있더라도 그저 닥친 환경에서 열심히 살아간다. 우리도 똑같다. 우리는 모두 나름의 밑바닥에서 살고 있다. 남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가 밑바닥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냥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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