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대용의 『의산문답』 -

  어떤 기(杞)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까 걱정하여 식음을 전폐하였다. 기나라 사람의 걱정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어 기나라 사람을 찾아가 “하늘은 기(氣)가 쌓여 있는 것이니, 기가 없는 곳이 없는데, 어찌 하늘이 무너지겠소? 땅은 흙덩이가 쌓인 것이니, 사방에 흙 아닌 데가 없는데, 어찌 땅이 꺼지겠소?”라고 답했다. 그제야 의문이 풀려 기나라 사람의 얼굴이 환해졌고, 그를 걱정하는 사람도 기뻐했다. 『열자(列子)』에 실린 ‘기우(杞憂)’에 얽힌 고사다. 지나친 걱정을 경계하는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이 이야기를 읽고서, 나는 그 논리를 납득할 수 없었다. 하늘과 땅이 끝이 없거늘, 기나라 사람은 어찌 의문을 풀었단 말인가? 걱정은 내려놓되, 의문은 의문대로 남겨 두었어야 옳지 않은가?
  영정조 때 실학자 담헌 홍대용은 그러한 의문을 죽을 때까지 놓지 않은 학자다. 담헌은, 당시로 보면 최첨단의 천문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일식과 월식의 원리를 알고 있었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북극과 남극, 적도와 황도를 이해하고, 위도와 경도를 측정하였다. 공전에 대해서는 부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지만, 자전에 대해서는 정확히 이해했다. 그의 주장을 지전설(地轉設)이라 부른다. 김석문이라는 분이 먼저 지전설을 언급하였으니 담헌이 지전설을 최초로 주장한 학자는 아니며, 담헌이 독자적으로 그것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그는 청(淸)에서 과학사상을 받아들여 스스로 천문학적 지식을 정교하게 다듬어 발전시켰다. 그는 우주가 무한의 은하계로 이루어졌다는 독자적 생각까지 하였다.
  담헌의 시대에 중국에는 만주족이 세운 청(淸)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선비들은, 이미 멸망한 명(明)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청을 오랑캐로 치부하여 무시하고, 명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 칭하며 스스로 자존심을 세웠다. 이와 반대로 청에서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여긴 학자 동아리를 일러 북학파라고 한다. 박지원을 비롯하여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이에 속한다. 담헌은 이들보다 앞서 1765년 북경을 경험한 후 북학파의 앞길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담헌을 일러 북학파의 선구자라 한다. 하지만 담헌의 사상은 그들보다 한발 앞서 있다.
  담헌의 과학사상도 놀랍지만, 세계에 대한 그의 혁신적 사고가 더욱 놀랍다. 담헌은, 지구의 중심을 중국이라 생각하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을 과감히 물리친다. 북학파 학자들도 근본적으로 중국이 세계의 배꼽이라는 생각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혁신적 사상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던 박지원조차도 중국의 성곽, 건물, 인민, 도구, 학문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생각에서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였다. 청 지배 하에서도 중화의 본질이 남아있기에 청 문물을 받아들여도 좋다는 논리다. 하지만 담헌은 다르다. 그는 세계의 중심은 주체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라 여겼다.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아닐 수 없다.

의무려산 입구. 왼쪽 비석은 건륭황제의 친필이다.


  『의산문답』의 일부이다. “중국은 서양에 대해서 경도의 차이가 180도인데, 중국 사람은 중국을 정계(正界, 기준)로 삼고 서양을 도계(到界, 기준에 대한 위도)로 삼는데, 서양 사람은 서양을 정계로 삼고 중국을 도계로 삼는다. 그러나 사실상 하늘을 이고 땅을 밟는 사람이면 기준을 어디로 한들 횡계(橫界, 기준에 대한 경도)도 없고 도계도 없으니 모두 정계인 것이다.” 조선의 많은 이들이 아직 지구를 평평하다고 믿고 있던 때, 담헌은 태양계가 어떠한 구조로 되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천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세계의 가치가 균등하다는 논리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는 사실상 인간과 만물이 평등하다는 생각까지 지녔던 학자다. “지구는 둥글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깨달음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담헌의 탐구를 종합적으로 담고 있는 책이『 의산문답』이다. 『의산문답』은, 허자(虛子)라는 조선 선비가 중국과 조선의 접경인 의산(의무려산)에 기거하는 실옹(實翁)이라는 기이한 선비를 만나 시대를 초월하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다룬 책이다. 담헌은 이 책에 인간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종합적으로 풀어 놓았다. 그 무대가 중국과 조선의 접경이라는 점이 특히 흥미롭다. 당대 조선학자들의 사고가 조선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북학파 학자들은 오로지 청에서 답을 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담헌은 조선도 청도 아닌 제3의 공간에 진리가 있음을 간파했다. 담헌의 이러한 태도가, 그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더 멀리 이르게 만들었다.
  2013년 여름, 오늘날 중국 북진(北鎭)의 의무려산에 다녀왔다『. 의산문답』의 현장을 직접 보고 싶었다. 철도가 남쪽 멀리 생겨, 오늘날 북진은 외진 곳이었다. 의산에 이르자 감회가 깊었다. 여러 해 동안, 최승회, 김경식 교수님과 더불어 담헌 홍대용에 대한 융합적 수업을 개설한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담헌은 인문학자이면서 사회과학자이고 자연과학자이니, 융합 수업으로는 적당한 대상이다. 담헌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깊어졌다. 하지만 담헌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담헌은 잠저(潛邸, 임금이 되기 전의 시기) 때 정조의 스승이기도 했으나, 그의 지식은 당대에 실제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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