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일제 강점기 당시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에 강제로 징용되어 노역을 하고 임금을 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이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대법원이 1인당 1억 원씩을 배상해야 한다는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일본은 그동안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거로 들며 배상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청구권을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이라며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판단해 일본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이는 일본에서 1997년 첫 소송이 시작된 지 21년 만, 국내에서는 2005년 2월 소송을 낸 지 13년 8개월 만의 판결이다.

 

강제징용 배상의 물꼬를 트다

 이렇듯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을 최종적으로 들어주면서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다른 피해자들의 승소 가능성도 높아졌다. 대법원은 현재 미쓰비시중공업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이하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피해자 소송을 심리 중이다. 미쓰비시중공업 피해자 23명은 2013년 서울고법 파기환송심에서 승소했고,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피해자 5명도 2015년 광주고법 항소심에서 승소해 현재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결론을 기다리고 있다.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대법원은 신일본제철 소송과 같은 법리를 적용해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하급심에서 진행 중인 소송도 여럿이다.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추가 피해자 17명과 후지코시 주식회사 피해자 34명이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 모두는 1심에서 승소한 뒤, 대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 항소심 선고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이날 판결로 재판부가 서둘러 선고를 내릴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신일본제철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시발점이 되어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들 또한 소송을 통해 권리 구제를 받을 수 있을 전망이다.

 

양국의 입장차와 그 파장은

 대법원의 배상 확정 판결이 내려진 뒤 국내 여러 단체는 환영의 뜻을 표했다. 청구소송을 진행해 온 대한변호사협회 일제 피해자 인권 특별위원장인 최봉태 변호사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판결이 “동아시아에 있는 일제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것”이라며 “동아시아 법치주의를 한 단계 고양시킨 판결이라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또한 2014년부터 일제 강제징용 사죄 배상운동을 벌여 온 본교 재학생이자 ‘대학생 겨레하나’의 대표 정철우 학우(항전정12)는 우리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 판결은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라며 “비록 먼 길을 돌아왔지만, 그 초석을 다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다.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이번 판결에 대해 “양국 및 국민들 간의 재산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 청구권 협정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라며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 구축해 온 우호 협력 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간부터 뒤엎는 것으로 지극히 유감”이라고 말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또한 “이번 판결은 국제법에 비춰볼 때 있을 수 없는 판단”이라며 “일본 정부는 국제재판을 포함해 모든 옵션을 염두에 두고 의연하게 대응해나가겠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양국의 입장 차이는 ‘65년 청구협정 체제’를 근간으로 이어졌던 한일관계의 악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판결의 후속조치가 이행되기 시작하고 판결이 한국의 정책에 반영된다면 일본이 대응에 나서게 되어 한일 간 외교적 전면전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한국 내 일본 기업에 대한 자산 압류 등 강제조치가 시작되는 것을 이번 사태의 ‘레드라인’으로 보고 있다.

 정부는 법원 판결이 외교 갈등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대응 방안을 구축하기에 나섰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지난달 31일 대법원 판결에 대한 후속 대응을 논의하기 위해 통화했다. 강 장관은 판결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관 합동으로 범정부차원의 입장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민관합동기구를 만들어 입장을 정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판결이 미치는 외교적 파장을 관리하기 위한 차원에서의 조치다. 외교부 관계자는 한 매체에서 “법원 판결을 존중하되, 제반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대응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일 관계를 오랫동안 다뤘던 관료 출신의 전문가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현재로서는 정부가 재판 결과를 존중하면서 일본과의 외교 마찰을 피하고 국내 여론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인다.”라며 우려를 표시했다. 전문가들의 이러한 분석이 나오는 만큼 정부의 신중한 대처가 필요한 국면이다.

저작권자 © 항공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