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1913-1960)
알베르 카뮈(1913-1960)

결국, 걸리고 말았다. 코로나! 얼마 전 몸살 기운이 있어 약국에 가서, 약을 사 먹었다. 하루가 지나자 식은땀이 나고 목이 아파졌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 오미크론 증상과 흡사했다. 부랴부랴 마트에 가서 자가검진키트를 사다가 검사를 해보았다. 초조하게 키트의 반응을 주시했다. 한줄, 그리고 또 한줄, 아뿔사! 코로나다. 이삼일이 지나자 온몸에 기력이 없고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 아프기도 하지만 몹시 불쾌했다. 밤에는 정신이 혼미해 마치 좀비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일주일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생각했다.

페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7년에 발표된 프랑스의 작가 카뮈의 작품이다. 7년간 구상과 집필을 거쳐 발표한 이 소설은 프랑스 비평가상을 받으며 크게 주목을 받았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도 이 소설에 찬사를 보냈다. 프랑스령 알제리의 작은 해변 마을 오랑에 페스트가 발생하여, 도시가 폐쇄된다. 오랑 시민은 삶의 최우선 목표가 매상고를 올리는 것일 정도로 범속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페스트라는 치명적인 병과 그 병으로 인한 감금 생활이라는 이중고를 겪게 된다. 이 소설은 이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이를 통해 카뮈는 인간과 신, 삶과 죽음, 사랑과 폭력 등 심오한 인간 문제들을 탐구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우선 주목되는 인물은 의사 베르나르 리외다. 리외는 사회운동가 타루, 신문기자 랑베르, 공무원 그랑, 신부 파늘루, 판사 오통, 정신이상자 카스텔 등 여러 인물들과 충돌하고 화해하면서 사건을 매개하며 종합한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의 재앙을 세상의 악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설교한다. 악에 물들지 않은 오통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로 고통스럽워 하는 모습을 보며, 리외는 파늘루 신부의 생각에 깊은 회의를 드러낸다. 아랍인을 취재하러 오랑에 머물던 신문기자 랑베르는 시가 폐쇄되자 사랑하는 아내와 생이별을 하게 된다. 그에게 그것은 현실이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리외의 정의로운 행위는 추상적이다. 랑베르에 의해 리외의 사고는 어느 정도 수정된다.

페스트는 단지 치명적인 질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행하는 모든 악의 상징이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상황에서 이 소설이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 나치즘의 횡포와 그 무자비한 폭력이 실현되는 현실을 보며 카뮈는 그것을 페스트로 형상화하였다. 여기서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페스트가 종식되고 도시가 개방되어 사람들이 자유를 만끽할 때, 불현듯 정신이상자 카스텔이 자기 방에 숨어 창가에 대고 묻지마 총질을 한다. 말하자면 페스트의 위험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타루가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듯이 페스트는 바로 우리 모두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언제든지 싹트려고 꿈틀거리는 악과 같다.

평범하면서도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공무원 그랑도 심심하지만 인간적인 매력을 풍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역시 타루다. 타루의 아버지는 검사인데, 어느 날 타루는 아버지의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거기서 그의 아버지는 피고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그때 피고는 햇빛을 받고 겁에 질린 올빼미 같았다. 타루가 보기에 그의 아버지는, 사회의 이름 아래 그의 목을 자르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는 집을 나와 인권운동가가 된다. 카뮈는 이 지점에서 법과 사회의 정의와 인간의 내면적 폭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페스트로 초토화된 오랑시에서 타루는 리외, 그랑과 더불어 보건위생대를 조직해 시민을 위해 활동한다. 너무 바빠 백신을 맞지 못한 타루는 결국 페스트로 죽는다. 그는 리외의 말처럼 영웅이나 성자라기보다 인간이었다.

페스트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 외지에서 온 신문기자 랑베르가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닌데요!”라고 말하자, 리외는 지금부터는 유감이지만, 선생은 이 고장 사람입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사회에 사는 한 우리 사회인이다. 말하자면 여기가 헬조선이라도 그것을 외면하거나 도피할 수 없다. 돈이 많아서, 지위가 높아서, 도피하려 한다면 그 삶은 껍데기일 수밖에 없다고, 온전히 여기 이 불편과 고통을 경험하면서 작으나마 끊임없이 수정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모두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함께 지고 살아간다고, 리외와 타루와 그랑은 말하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랑시를 빠져나가려던 랑베르가 결국은 그 기회를 포기하고 보건위생대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페스트'의 표지(1947)
 '페스트'의 표지(1947)

 

페스트에 대응하는 행정가들의 안이하면서도 형식적인 태도를 보면서, 코로나에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를 생각하게 된다. 폐쇄 상태에서 해제되자 지난 일을 점점 잊어버리면서도 여전히 페스트 상황의 습관을 버리리 못하는 오랑 시민들을 보면서, 또 코로나를 생각한다. 페스트가 그렇듯이 코로나도 단순한 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사회 인류 전체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페스트가 그렇듯이, 언제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는 사회적 증상의 한 징후이며, 우리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다.

마음을 닦는 마음으로 일주일을 격리했다. 어쩌면 내겐 혜택이었다. 그렇다고 모두 코로나에 걸리라는 말은 아니다. 모쪼록 코로나 종식까지 주의하시기 바란다. 허나 코로나는 도처에서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 영어(囹圄): 죄인을 가두어 두는 곳. 한때 형무소라고 부르다가 현재 교도소로 고쳤다.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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