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인생」 강의를 준비하다가 흥미로운 전시를 발견하였다.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라는 전시다. 미술관 측은 “1930-1940년대 경성(京城, 오늘의 서울)이라는 시공간을 중심으로, ‘문학’과 ‘예술’에 헌신하며 이 역설적인 시대를 살아 내었던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김환기, 이중섭, 구본웅 같은 화가들의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즐겁기도 하지만, 그들이 그린 이상, 정지용, 박태원, 구상, 윤동주 등 시인 작가들의 작품집 표지나 삽화도 볼 수 있어 더욱 신난다. 문학과 미술의 콜라보 전시라고나 할까?

 

 4월 초 벚꽃 필 무렵, 나는 덕수궁 정문 대한문을 들어섰다. 속살거리는 봄비에 떨어진 벚꽃잎들이 땅 위에 무늬를 내고 있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서인지 비가 내려서인지, 토요일인데도 덕수궁은 한산했다. 한복을 입은 선남선녀가 드문드문 사진을 찍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중화전(中和殿)을 지나 곧바로 석조전으로 향했다. 웅장한 석조 기둥 사이를 낮은 몸으로 들어서니 전시장은 제법 북새통이다. 전시회는 네 개의 주제 아래 펼쳐지고 있었다. 당대 전위예술가들의 모습, 신문소설의 삽화나 문예 잡지의 표지, 문인과 화가 간의 우정 그리고 수필로 이름을 알린 화가들의 수필집과 그림들…….  

모던 금강 만이청봉!

 처음 전시장 들어서면 흥미로운 삽화 한 장이 기다린다. 『별건곤(別乾坤)』 표지 「모던 금강 만이천봉!」이다. 맨 아래 ‘매소루(賣笑樓, 웃음을 파는 집)’가 있고, 요릿집, 약방, 파라마운트 영화관, 주점, 카페, 이발관, 호텔, 바(bar)가 산을 이룬다. 산의 맨 위에는 예배당이 있다. ‘천당이 갓찹다’라고 쓰인 깃발이 펄럭인다. 애드벌룬도 두둥실 떠 있다. 그런데 그 옆 봉우리 위에는 ‘결투장’이 있고, 그 바로 아래는 ‘자살장’이 있다. 한 여인이 거꾸로 뛰어내리는 모습도 보인다.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별건곤이란 ‘유별난 세상’이라 풀어도 좋을 듯한데, 이는 과연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만이천봉의 화려한 금강산! 온갖 욕망이 뒤얽혀 있는 바로 오늘 우리 사회를 희화화한 그림처럼 보인다.

구본웅이 그린 시인 이상의 초상화

 바로 그 옆에 가장 보고 싶어 했던 구본웅이 그린 시인 이상(李箱)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몰려 있는 관객을 보니, 시인 이상의 인기에 새삼 실감을 느낀다. 이상에 비하면, 그림을 그린 구본웅은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이상의 죽마고우이며 평생지기라 할 수 있는 구본웅은, 일찍이 도일(度日)하여 서양화를 배웠으나, 당시로는 비주류인 이과전*에서 조선인으로는 처음 입선했다. 그는 굵고 강렬한 붓 터치로 인해 ‘야수파’로 불리고 있으며, 2살 때 척추 손상으로 곱추가 되어 한국의 로트렉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인형이 있는 정물」은 이상이 운영하던 다방에 걸려 있던 그림이라고 한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외할아버지라고 하니,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할까?

 

 이 전시회에서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양화 ‘자화상’으로 입선했던 화가 이상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 이상의 직업은 건축기사다. 건축기사인 이상이 1922년 3월 조선건축회 학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서 1등과 3등으로 당선되었는데, 이 전시회에서 그 표지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무런 설명이 없어, 모르고 지나치는 분이 꽤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박태원이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할 때, 이상이 ‘하융’이라는 가명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당시의 삽화를 여러 점 감상할 수 있다. 이상이 손수 그린 자신의 단편소설 「동해」의 삽화도 볼 수 있다.

 

 이중섭의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전쟁통에 가족들을 일본에 보내고, 영영 가족과 이별할지 모른다는 절망 속에서 이중섭은 시인 구상의 집에 기거한다. 시인 구상이 자기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서 태워주는 모습을 이중섭이 화폭에 담았다. 자전거 타는 구상 아들을 바라보는 이중섭의 눈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담뿍 담겨 있다. 정현웅이 그린, 백석의 초상화와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삽화도 아름답다. 김용준이 그린 이태준의 초상화와 『청록집』과 『임꺽정』의 표지, 천경자와 장욱진의 자작 수필집과 그림들…….

 

 덕수궁은 참으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궁궐이다. 중화전을 비롯한 즉조당, 석어당, 함녕전 등 구시대 건물이 궁궐의 전면을 차지하고, 안쪽으로는 조선 후기 최고의 현대 석조 건축물인 석조전이 있다. 고종은 1910년 완공된 이 건물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함녕전 뒤에는 고종이 커피를 즐기며 외교를 펼쳤다는 정관헌이 있다. 석조전 뒤로는 을사늑약의 비극적 역사 현장 중명전이 있고, 궁 뒤에는 아관파천이 행해진 구 러시아 공관이 있다. 과거와 현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이 공간에는 우리의 비극적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다. 천천히 보면서 생각해 볼 것이 많은 곳이다. 가까이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과 최초의 개신교회 정동교회도 가볼 만한 곳이다.

 

 전시장의 하얀 벽에 쓰여 있던 이상의 글이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 김환기가 표지를 그린,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집이라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다. 코로나19 때문에, 전시를 보려면 예약해야 하니, 가기 전에 반드시 인터넷으로 예약하기 바란다.

 

*일본 문부성에서 주최하는 문전(文展)을 ‘일과전’(一科展)’라 하고, 재야에서 주관하던 ‘이과전’이라 하였다. 일과가 전통적 사실주의라면, 이과는 현대적 모더니즘인 셈이다.

저작권자 © 항공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