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다섯 개의 궁궐이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그것이다. 경복궁이 법궁(法宮)으로서의 장엄한 아름다움이 있다면, 창덕궁과 그 후원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천연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일제가 동물원으로 격하시켰던 창경궁도 이제는 어느 정도 복원되어 단아한 멋을 자아낸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사라지다시피 했고 제대로 복원되지도 못한 경희궁도 그렇지만, 임진왜란 이후 불가피 하게 궁궐로 삼게 된 덕수궁도 궁궐로서의 아름다움은 그리 깊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수궁은 좀 다른 차원에서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덕수궁과 그 뒷길에는 역사적 상처와 다채로운 문화와 인생의 낭만이 어려 있기 때문이다.

 덕수궁은 본래 경운궁(慶運宮)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 양으로 돌아왔을 때, 궁궐들이 모두 불타 선조는 머물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선조는 월산대군의 사저(私邸, 개인 저택) 를 궁궐로 삼아 머문다. 다음 임금 광해군은 이곳을 확장 개 축하여 행궁(行宮)으로 삼아 경운궁이라 칭한다.* 이후 고종 대에 이르러 경운궁은 다시 법궁이 된다. 궁 북쪽 주변에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서구열강의 공사관이 들어서 있 어, 이곳은 당시 한반도 정치의 심장부였다. 하지만 이는, 덕 수궁 북쪽 터를 서구열강에 팔아넘겨 조선의 자주권을 약화 시키려는 일제 계략의 결과였으니, 씁쓸할 따름이다. 그래서 오늘날도 여기에 외국 공사관들이 자리 잡고 있다.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자,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 (移御)하며, 아버지 고종이 ‘덕을 누리며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덕수궁(德壽宮)’이라 칭한다.

 덕수궁에도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석어당, 인조가 즉위 한 즉조당, 고종이 승하한 함녕전 등 유서 깊은 건물이 많지 만, 여기서 특히 인상적인 건물은 석조전과 정관헌이다. 덕수궁을 거닐다 보면, 파르테논 신전처럼 우람하게 서 있는 유럽 식 건물이 석조전이다. 이는 대한제국 때 외국 사신 접견장이 었고, 광복 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이었으며, 한때 국립중 앙박물관이었다.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이다. 우리 궁궐 양식에 어울리지 않는 이 건물은 격동기의 역사적 비극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정관헌도 그러한 의미를 지닌 건물이다. 정 관헌은 아담한 서양식 건물이다. 여기에서 고종은 커피를 마시며 외교를 펼쳤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처형인 손 탁(Sontag)의 권유로 커피를 접하게 되었다. 정관헌은 우리 나라 최초의 카페인 셈이다.

 덕수궁은 궁 자체보다 그 주변이 더 매력적이다. 덕수궁 정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돌담을 안고 돌면, 덕수궁 돌담길로 이어진다. 이 길은 걷기에 너무도 좋다. 혼자 걸어도 좋고, 둘 이 걸으면 더욱 좋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덕수궁 돌담길 을 연인이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전한다. 왜 이런 설이 생겼을까? 예나 지금이나 이 길은 최고의 데이트코스다. 아마도 이 길을 한번쯤 걸어보지 않은 연인은 없을 것이 다. 헌데 젊은 시절 연인이란 헤어지기 십상이다. 그러니 이 길을 걸은 대부분의 연인이 헤어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 까? 이 길은 최고의 데이트코스이며 상처와 치유의 길이며 추억의 길이며 낭만의 길이다.

 돌담길을 따라 걷다가 왼편 언덕으로 오르면, 석조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서울시립미술관이다. 여기에 반드시 봐야할 전시가 있다.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전(展)이다. 화가 천경자가,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고 하며, 1998년 자신의 작품 93점을 서울 시립미술관에 기증했고, 미술관은 천경자 작품을 무료 상설 전시하고 있다. 한국화로 출발했지만, 직접 안료를 섞어 물감 을 만들어 쓰며 서양화 기법을 도입하여, 그녀의 화풍을 어떤 틀에 맞추어 설명하기 어렵다. 그녀의 그림에서는 고갱이 나 마티스의 원시적이고 야성적인 힘과 샤갈이나 앙리 루소 의 몽상적 정신, 프리다 칼로에게서 나타나는 영혼의 상처가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그냥 그것들을 모아 놓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를 통섭하여 독특한 자기 세계를 일구었다.

 시립미술관 언덕을 내려오면, 붉은 벽돌로 지은 단아한 교회당이 보인다. 햇빛을 안고 선 첨탑이 눈부시다. 정동교회 다. 1885년 아펜젤러는 한옥 건물의 베델(Bethel) 예배당을 연다. 1887년 아펜젤러는 이 한옥을 개조해 감리교 교회당으 로 사용하는데, 이것이 최초의 감리교 교회당이다. 정동교회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빅토리아식 교회다. 1920년, 영원한 누나 유관순이 순국하였을 때, 일제는 해외 언론 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장례를 치른다는 전제 아래 시신을 이화학당에 인도했고, 당시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정동교회를 지나 정동극장 옆 골목 끝에,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이 숨어있다. 중명전은 본래 덕수궁 내의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외따로 떨어져 있으니 덕수궁이 얼마나 훼손되었 는지가 짐작된다. 중명전에는 을사늑약 당시의 상황을 실감 할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1905년 이토 히 로부미는 을사늑약의 승인을 획책한다. 이에 한규설과 민영 기가 조약체결에 적극 반대하였고, 고종은 끝내 체결을 거부 했으나, 이토는 강압적으로 체결을 밀어붙인다. 이토는 이에 찬성하는 대신들만 모아 회의를 열고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서 조약을 승인받는다. 여기에 적극 가담한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을 이른바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을사 늑약이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외교권과 자치권을 잃고 실제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중명전을 나와 다시 정동길을 따라가면 아관파천의 현장 인 옛 러시아 공사관 터가 나온다. 1895년 일제는 일본 깡패 들을 동원해 조선의 황후를 시해한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일제는 하늘과 땅과 인간이 모두 분노할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벌인 것이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다. 아관이란 러시아 공사관이며, 파천은 황제가 거처를 옮기는 것을 이른다. 고종 은 1년 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잠시 친러파가 정권을 장 악한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일제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결국 대한제국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에 현재는 3층의 하얀 석탑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당시 상황 을 상상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덕수궁 뒤 정동길을 걷다보면,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 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덮힌 조그만 교회당” 하는 노래가 입가에서 저절로 흘러나온다.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다. 아마도 지금 덕수궁 돌담길에는, 눈이 부시도록 짙게 물든 단풍이 높고 푸 른 하늘을 배경으로 수채화를 그려놓고 있을 게다.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이런 시절에는 연인과 함께 정동길을 걸으며 역사와 문화와 자연에 취해봄직하다.

* 조선시대 궁궐 제도는 법궁(法宮)과 행궁(行宮)의 양궁 체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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