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길 문화기행2

시안, 란저우, 자위관(가욕관, 嘉峪關)을 지나면서 풍경이 바뀌고, 도시 외관이 달라졌으며, 무엇보다 중국 한족(漢族)과는 다른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시안은 한족 문화의 정수(精髓)를 담고 있는 도시이다. 란저우에 오니 회교도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아침에 역 앞에서는 회교도들이 분주히 회교도 음식 ‘란’을 팔고 있었다. 한족들도 그것을 즐기는 듯했다. 자위관에 이르자 낯선 사막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하늘 아래 지평선이 펼쳐졌다. 본격적으로 비단길 여행이 시작되고 있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둔황(敦煌) 시내에 도착했을 때, 거리에는 이미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둔황에서 3박 4일을 머물 예정이었으니, 시간은 넉넉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둔황을 느끼고 싶었다. 호텔에 짐을 부려놓자마자 택시를 타고 명사산으로 갔다. 채 10분도 되지 않아 명사산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 뒤로 높은 모래 산이 웅장한 기세로 서 있었다. 사위가 어두워지면서 산은 더 장엄하게 가까이 다가왔다. 건조한 모래바람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바람이 불면 모래산이 운다고 하여 명사산(鳴砂山)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명사산에서 두 나라의 군대가 전투를 벌였는데, 어디선가 모래바람이 불어와 두 군대를 파묻어 버려서, 바람이 불면 그때 묻힌 군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다.

둔황에서 새긴 낙관

둔황은 고비사막 한 귀퉁이에 형성된 오아시스 도시이다. 한무제(漢武帝)가 서역 정벌을 위해 파견한 장건에 의해 둔황은 중국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둔황은 비단길 무역의 한 중심지로 성장한다. 당(唐)에 이르러 전성기를 구가하지만 13세기에 몽골의 지배아래 놓이면서 쇠퇴하다가 명(明)에 이르러 비단길의 폐쇄와 더불어 세계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러다가 20세기에 이르러 둔황은 다시 세계인의 이목을 끈다. 막고굴(莫高窟)에서, 1036년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감추어둔 45,000권의 필사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막고굴은 둔황을 대표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석굴사원이다. 실크로드가 번성하던 시기 약 천년동안 명사산의 사암 절벽에 천여 개의 석굴을 만들었다. 벌집처럼 형성된 이 석굴들의 불상과 벽화에는 비단길을 왕래하던 다양한 민족의 문화가 녹아있다. 이 석굴에서 천여 년동안 숨어있던 대량의 고문서들이 몸을 드러낸 것이다.

막고굴을 관리하던 도교 도사 왕원록이 석굴을 청소하다가 숨겨진 석굴을 발견한다. 거기에는 불경을 포함한 고문서들이 쌓여있었다. 경전이 숨겨져 있었다하여 이른바 장경동(藏經洞)이라 부른다. 신라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바로 여기에서 잠자고 있었다. 이 사건은 비극의 서막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학자와 탐험가들이 이곳을 찾아왔다. 차례로 그들은 왕원록을 뇌물로 매수하고 이 귀중한 고문서들을 헐값에 사갔다. 심지어는 프레스코 불상 벽화를 뜯어가기도 하였다『. 왕오천축국전』도 이때 프랑스로 들어가서 지금은 파리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있다. 이로 인해 왕원록은 결국 청 정부에 의해 처형되지만, 이미 막고굴의 유물들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버렸다. 그래서 막고굴 보존을 위해 중국은 석굴 관광을 지극히 제한하고 있다. 하루에 두 번 제한된 수의 신청자에 한해서 관람할 수 있다. 가이드를 따라가며 15개의 석굴만을 볼 수 있으며, 사진촬영은 물론 금지다. 그래서 대개 막고굴을 관람하고 나면 허탈한 기분이 들기 마련인데, 나 역시 그러했다. 이 위대한 불교문화 앞에서 흥분과 가격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 지극한 일부만을 감상할 수밖에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막고굴은 둔황을 대표하는 불교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막고굴을 충분히 감상할 수 없는 아쉬움을 달랠 만한 곳이 둔황에는 많다. 동서 40km, 남북 20km에 달하는 광대한 모래산인 명사산이 있다. 그 자락에 초승달모양으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오아시스 월아천(月牙泉)이 있다.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관문 역할을 했던 양관과 옥문관도 있다. 미국의 그랜드캐년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규모의 기괴한 지형 야단지질공원(雅丹地質公園)은 신기하기 그지없다. 그야말로 둔황은 문화와 자연이 한데 어우러진 신비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연중 세계 곳곳에서 관광객이 몰려 든다. 나는 둔황에서 충분히 많은 것을 보고 깊이 느꼈다. 새로운 것을 만나는 즐거움이 컸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내가 본래 기대했던 막막한 사막의 고적감을 느낄 수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둔황은 이제 완전히 관광도시가 되었다.

명사산(鳴砂山)
월아천(月牙泉)

 

둔황에 있는 동안 밤이 되면 야시장에 들렀다. 회족음식도 먹어보고, 술도 마셨다. 그리고서 시장을 둘러보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소뿔로 만든 빗이나 장신구, 수정 안경, 흑구기자, 나무에 새긴 둔황의 불상과 문양들, 둔황에 관한 각종 서적들……. 모두 탐이 났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도장이었다. 도장을 직접 파주는 가게들이 더러 있었다. 나는 나와 가족, 그리고 몇몇 지인의 도장을 새겼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 찍을 낙관도 몇 개 만들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중용에 나오는 문구를 요약하였다. 깊이 새겨 보기 바란다. 如行遠自邇登高自卑(여행원자이등고자비: 마치 먼 곳을 가는 사람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가고, 높이 올라가는 사람은 낮은 곳으로부터 올라가야하는 것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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