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유래없는 무더위가 한반도를 뒤덮었다. 이럴 때 사람들은 피서(避暑)를 간다. 18세기 청나라 황제는 피서를 위해 피서산장(避暑山莊)을 지었다. 오늘날 피서산장은 중국인들에게 인기 여행지이지만, 우리에게는 좀 다른 이유로 한번쯤 가 볼 만한 곳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주무대가 바로 이 피서산장이기 때문이다.
  1780년(정조 4)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청나라 건륭제의 70회 생일 축하를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간다. 당시 중국사절단은, 한양을 출발하여, 항공대학교가 있는 화전을 지나, 의주, 단동, 심양 등을 거쳐 북경에 이르렀다. 가는 데만 두 달이 걸렸으니, 대국의 서울 구경이 좋긴 좋아도 고단한 여정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연암은 북경에 도착해서 더 가야만 했다. 연암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건륭황제는 북경을 떠나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피서 가서 자신의 70회 생일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연암 일행은 다시 열하까지 가야만 했다. 그 여정을 연암은『 열하일기』에 고스란히 담았다.
  『열하일기』에는 지리와 풍속은 물론, 당시의 정치상황이나 세계정세 그리고 종교, 철학, 예술을 아우르는 다양한 담론이 담겨있다. 두루 알려져 있는 「허생전」이나 「호질」도 바로 이 책에 실려 있다『. 열하일기』는 연암의 사상이 두루 나타나는 시대의 문제작이다. 이 책에서 연암이, 청나라의 장관(壯觀)은 깨진 기와나 똥거름이라고 이른 데에 대해, 많은 이들이 그의 실용주의 사상을 거론한다. 연암처럼 당대 조선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청나라에서 찾으려고 했던 학자
들을 일러 북학파라 한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의 북학파 학자들이 그를 스승처럼 따랐기에, 연암은 북학파의 수장(首長)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연암은 북학파 학자들 중에서 가장 늦게 북경을 경험한다. 당시 연암의 나이는 44세였다. 아마도 가슴 벅찬 여행이었을 것이다.
  『열하일기』는, 그 내용의 혁신성도 그러하지만 문체의 참신성으로 인해 시대의 문제작이 된다. 연암은 마치 소설처럼 장면 중심으로 서술하고, 생생한 구어체를 구사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역설과 아이러니를 통해 시대를 풍자한다. 정조는, 당시 혁신적 학자들의 문장이 격식에 어긋난다고 판단하고, 이를 금한다. 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가 그 중심에 있었다. 말하자면 금서가 된 셈이다. 출판 당시 금서였다가 시대가 변하면서 고전의 반열 위에 우뚝 서는 문제작의 운명을『 열하일기』도 그대로 따라갔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가 그랬고, 루소의『 고백록』이 그러했으며,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그러했다. 사실은 시대가 변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이 책들이 시대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
  피서산장은 북경에서 북동쪽으로 250km쯤 떨어진 열하(오늘날 승덕(承德))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1703년 강희제때 착공하여, 옹정제를 거쳐, 1792년 건륭제에 완공된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피서지가 아니다. 청의 황제들은 일 년이면 5개월가량을 여기에서 머물며 통치했다. 황제의 집무실 격인 궁전 뿐 아니라, 호수와 산림을 포함하는 거대한 정원을 조성하고, 또 산장의 주위에는 라마불교 양식의 여러 사원, 즉 외팔묘를 건축하기도 했다. 그래서 별궁, 이궁, 행궁
등으로 불렀다. 말하자면 열하에 피서산장이라는 또 하나의 작은 자금성을 건설한 셈이다.

▲ 강희제의 친필-피서산장


  강희제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심양(瀋陽)에 제사 지내러가다가, 열하에 이르러 그 기후와 풍경에 반하여 그곳에 별궁을 짓기로 결심한다. 유목민의 습성이 몸에 밴 강희제는 일부러 게르에서 생활하며 승마를 즐겼다. 산장 정궁(正宮)의 오문(午門)에 걸려있는 ‘피서산장’이라는 현판은 강희제가 직접 쓴 것이다. 하지만 열하에 별궁을 지은 데는 또 다른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다. 강희제는 북방세력에 대한 방비를 위해 피서산장을 기획했다. 새로운 지배 세력인 만주족 대족장으로서 그는 세계를 제패했던 몽골족을 심히 경계했다. 이에 대해 연암은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 청나라가 통일을 하고 처음으로 ‘열하’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열하는 만리장성 밖의 군사적 요충지이다. 강희제부터 여름이면 황제가 이곳에 머물며 더위를 피했다. 궁
전은 채색하지 않아 화려하지 않았다. 황제는 ‘피서산장’이라 이름붙이고, 여기서 책을 읽고 산수를 즐기며 세상일을 잊고 평민처럼 소일하는 듯했다. 하지만 사실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몽골의 숨통을 쥐어 틀 수 있는 변방 깊이에 자리 잡고, 피서를 핑계 삼아 황제 자신이 북방을 방비하고 있는 셈이다.” 현실의 이면을 살피는 연암의 날카로운 정치감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청나라 황제들은 피서산장에서 제국을 통치하며 북방민족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했으
니, 이는 정치, 군사, 외교의 요충지였다고 할 수 있다.
  피서산장에는 박지원에 대한 기념비도 있다. 아마도 박지원 덕분에 더러 피서산장을 찾는 한국인들이 있으니, 그에 대한 답례인 듯하다. 하지만 이제 박지원이 머물렀던 태학관에서 옛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중국인들이 연암에 대해 제대로 알리는 만무하다. 그러니 기념비에는 ‘朴趾源(박지원)’을 ‘撲趾源’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래도 내 눈에는, 열하에 이르는 길 곳곳에서, 그리고 열하의 구석구석에서 연암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우리에게 열하는 청 황제들의 피서산장이 아니라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의 주 무대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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